목숨까지 바친 형제의 독립운동

조회 1918 | 2017-12-0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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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명문가에서 여섯 명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이조판서, 작은아버지는 영의정,
또한,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명문가
이항복의 후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엄청난 경제력을 지녔던 집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말은 개항과 문명의 충격이 거세던 변화의 시대였습니다.
제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노골적으로 한반도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조국을 되찾는 것은 대한민족으로 해야 할 도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명문가의 집안으로서 일본의 치하에서 생명을
연명한다는 것은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나라가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강제 편입되자
형제는 독립운동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국내에서 하는 독립운동의 한계를 느낀 형제들은
대대로 내려온 집과 땅을 포함한 엄청난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 하나로
만주로 망명한 형제는 좀 더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김좌진, 홍범도 장군의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1920년 폐교될 때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을 키워낸
바로 신흥무관학교입니다.




1945년 11월 5일 중국 상하이 공항에 모여있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모습.
오른편에 홀로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자 쓴 노인이
다섯째 이시영 선생님입니다.


첫째 이건영(李健榮, 1853~1940)
중국의 상해에서 88세의 노령에도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둘째 이석영(李石榮, 1855~1934)
가장 많은 독립자금을 보냈지만, 상하이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결국 아사하셨습니다.

셋째 이철영(李哲榮, 1863~1925)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맡아 일하다 병사했습니다.

넷째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자식들을 양육할 수 없어 보육원에 맡기고,
본인은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때울 만큼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독립운동을 하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의해 중국의 뤼순감옥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다섯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직을 맡았으며
조국에 돌아와 신흥무관학교의 정신을 이어 신흥대학을 설립했고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하셨습니다.

여섯째 이호영(李頀榮, 1875~1933)
밀정을 처단하는 다물단 단원으로 활동하다
1933년 베이징에서 가족들과 함께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여섯 형제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나라를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그분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는 대한민국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우리가 모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 오늘의 명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이다.
- 우당 이회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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