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값 800배 됐다…'누드만 그리던 아저씨'의 사연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조회 615 | 2023-10-0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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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고, 잘생기고 예쁘지 않은데도, 우리를 사로잡고 꿈꾸게 한다." /노이에 피나코테크 소장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안타깝게도 그 후 밀레의 삶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지역에서 주는 장학금은 원래 받기로 했던 것보다 덜 오기 일쑤였고, 아예 안 올 때도 많았습니다. 작고 악취를 풍기는 방들을 전전하며 생활해야 했습니다. 시골뜨기였던 밀레를 등쳐먹거나 이용하려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밀레는 이런 도시의 살벌한 분위기에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실력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치적 감각이 부족해서 끌어주는 사람이 없는 탓에 별다른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자뱅 시장의 초상(1841). 문제의 작품이다. /토마 앙리 미술관 소장 1841년에는 황당한 모욕도 당해야 했습니다. 사건은 장학금을 주던 지역 시청에서 밀레에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시장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의뢰하면서 시작됐습니다. 문제는 밀레가 생전의 시장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 그래서 밀레는 사람들에게 시장의 얼굴 특징을 물어보고 시장의 청년 시절 초상화를 참고해가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 자체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실물을 모르는데 시장과 닮은 그림을 그리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시 의회는 “유족에 대한 모독”이라며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밀레는 지역의 유력 인사들에게 ‘실력 없는 화가’로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목장의 양떼(1872). /오르세 미술관 소장 여기에 더욱 큰 불행이 겹칩니다. 이 해 밀레는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몸이 약했고, 결혼 생활을 시작한 지 불과 2년 5개월 만에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수입도 명예도 없던 밀레는 아픈 아내에게 좋은 약과 음식, 집을 마련해줄 수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건 고작 죽어가는 아내 곁을 지키는 것뿐. 밀레는 죽을 때까지 이 시기를 떠올리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재능을 알아봐 주지 못하는 세상, 틈만 나면 자신을 등칠 생각만 하는 사람들, 가난과 불명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세상에 분노하고 좌절할 법도 하지만, 밀레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엔 못된 사람도 있지만 좋은 사람도 있어. 좋은 사람 하나가 못된 사람 여럿이 준 상처를 위로해줄 수 있는 법이야.” 평범한 사람을 담다 그 말처럼, 밀레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꺾이지 않는 내면의 힘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상심해 고향으로 돌아온 밀레는 2년 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재혼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친구는 이 때 밀레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밀레의 집 살림살이는 형편없었다. 그는 아기들을 달래고 끝없이 자장가를 불러줬다. 그리고 다시 황소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삭 줍는 여인들(1857). /오르세 미술관 소장 이 시기 밀레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당시 잘 팔리던 여성 누드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이런 그림이 꼭 외설스러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에서는 여성의 신체가 나오는, 신화나 역사를 소재로 한 그림이 주류였거든요. 하지만 어느 날 파리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이 “밀레는 누드만 그리는 화가”라고 말하는 걸 듣고 충격받은 밀레는 결심했습니다. ‘생활은 어려워져도 다시는 누드화를 그리지 않겠다. 내가 가장 잘 그릴 수 있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겠다.’ 그 주제가 바로 농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밀레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어린 시절 고향의 모습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는 힘들게 일하면서도 언제나 다음 끼니를 걱정하는 농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표정에는 근심이 가득했고,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에게는 생기와 활력이 넘쳤습니다. 농부, 나무꾼, 광부, 사냥꾼…. 모습은 초라해도 이들이 자연에 쏟는 정열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그림으로 그릴 만한 것이었습니다. 수확하는 살마들의 휴식(1851~1853).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보스턴미술관 소장 괭이에 기댄 남자(1860~1862). 살롱 입선작이지만 "농부가 아니라 살인자의 모습 같다"는 등 일부 평론가들의 혹평도 받았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구도를 통해 평범한 농부의 위대함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폴 게티 미술관 소장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의 그림은 발표되자마자 프랑스 사회의 화젯거리로 떠올랐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정권 교체와 숙청, 폭동이 밥 먹듯이 일어났습니다. 사회 전체가 좌·우파 두 편으로 갈라져 싸웠지요. 그래서 밀레의 그림은 주로 정치적으로만 해석됐습니다. 하지만 이런 오해에도 밀레는 꿋꿋이 농민을 그렸습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야. 하지만 좌파 취급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어. 인간이야말로 예술이 다루는 가장 감동적인 주제야. 힘들게 괭이질하는 가난한 농부들의 모습에서 나는 참다운 인간성, 위대한 시(詩)가 보여.” 비례와 원근법 등 미술 이론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농민들의 모습과 동작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 덕분에 그의 작품은 갈수록 더 좋아졌습니다. 상도 심심찮게 받았습니다. 이 시대에 농민 그림으로 밀레와 비교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밀레의 작품 속 농부들의 얼굴에서는 촌티가 풀풀 나고 옷차림도 초라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에게는 일종의 가슴 뭉클한 위대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밀레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이를 보는 어머니는 생김새와 관련 없이 아름다워 보이잖아. 아름다움은 생김새가 아니라, 표정이나 태도에 가까운 거야.” 새를 쫓는 소녀(1866~1867). 1867년 살롱 출품작으로, 1등상을 받았다. /도쿄 후지 미술관 소장 별이 빛나는 밤(1850~1865). /예일대 미술관 소장 하지만 야속하게도 가난은 계속됐습니다. 불안한 정치 사회적 상황 때문에 가뜩이나 미술시장이 위축된 상황에서, 정치적 작품이라는 낙인이 찍힌 밀레의 그림을 선뜻 살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절반은 그를 매도하는 우파, 나머지 절반은 멋대로 그를 이용하는 좌파 때문이었습니다. 40대 가장이었던 그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은 이런 어려움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보게, 제발 내 그림으로 돈을 좀 구해 주게. 값을 따지지 말고 팔아도 돼. 100프랑도 좋고, 50프랑, 정 안 되면 30프랑에라도 팔아서 돈을 보내주게….”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조차 없던 밀레는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인간, 희망 만종(1857~1859). "감사 기도가 아니라 죽은 아기를 추모하는 기도이고, 밀레가 아기의 관을 그렸다가 지웠다"는 얘기가 퍼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연구자들 사이의 정설이다. /오르세 미술관 소장 밀레의 그림은 화가 자신의 인생과도 닮았습니다. 그의 작품 ‘만종’에는 고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있습니다. 밀레 역시 가난과 불운에 시달리면서도 늘 그림을 더 잘 그릴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밀레가 차라리 어떤 사상에 공감했다면 정치권에 붙어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회주의 단체가 자신의 이름을 멋대로 명단에 올리자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한 적도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화가가 된다는 건 너무 복잡하고 벅찬 일인 것 같아. 사실 난 그런 주의나 주장을 알고 싶지도 않아. 그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일일 뿐이잖아. 나는 본질에만 관심이 있다고.” 양치기 소녀(1863). 1864년 살롱 입선작으로 발표 당시 극찬을 받으며 밀레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오르세 미술관 소장 그가 생각하는 본질이란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밀레는 어렵게 살아가는 농부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했고, 한편으로는 여기서 위대함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일하는 모습을 그릴 생각뿐이야. 누구나 힘들여 일하잖아. 땀 흘리며 일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건 인간의 숙명이야. 그래서 세상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직업에서 발전을 꾀해야 한다고 생각해. 뭘 하던 자기가 맡은 일을 더 능숙하게 잘해야 하는 거지. 다른 얘기를 하는 사람은 꿈을 꾸고 있거나,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야.” 밀레의 이런 노력은 마침내 50대에 접어들어 인정받게 됐습니다. 최고 권위의 미술 전시였던 살롱에서 1등 상을 여러 번 탔고,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전시를 성공시키며 국내외에서 거장이란 평가를 받게 됐습니다. 좌·우파를 떠나 그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화가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 늦게 찾아온 성공이었습니다. 그간 고생하며 몸이 너무 망가진 탓에 밀레는 뇌종양을 앓다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1860년 1000프랑에 팔았던 '만종'은, 불과 30년 뒤인 1890년 80만프랑에 거래됩니나. 봄(1868~1873). /오르세 미술관 소장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하루하루, 그 속에 위대함이 있다는 사실을 밀레는 자기 작품과 삶을 통해 알려줬습니다. 그가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며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지금 보시는 ‘봄’은 밀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 중 하나입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환한 빛과 무지개를 통해 밀레는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인생의 봄날도 온다”는 위로를 전하려 했던 게 아닐까요. 지난 한 주간 쌓인 피로를 털어낼 수 있는, 편안하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이번 기사는 'Jean-Francois Millet, Peasant and Painter' (Alfred Sensier 지음), 'Millet'(Etienne Moreau-Nelaton 지음)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3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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