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클로스는 있다

조회 1534 | 2016-03-22 22:19
http://www.momtoday.co.kr/board/46096

ㅎㅎㅎㅎ1988보셨는지요.

거기서도 산타크로스때문에 생긴 에피소드가 있죠

 




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이었다.
내년이면 나는 열한 살이 되는 제법 큰 어린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입을 헤 벌린 채 태평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내 동생은...
아직도 산타클로스를 믿었다.

작년 크리스마스 아침,
동생의 머리맡에는 매끈한 미니카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최신형 미니카를 껴안고 방바닥을 굴러다니며 기쁨을 표현한 동생은,
대뜸 내년 크리스마스 선물까지 예약해 두었다.
당연히 미니카였다.

하지만 올해 크리스마스는 동생의 여덟 살 인생 최악의 날이 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아침, 동생의 머리맡에는 미니카는커녕,
미니카보다 못한 선물조차 없을 것이다.
나는 우리 집 사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크리스마스부터는 산타클로스가 없으리란 것도...

나는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러고도 모른 척 입을 다물고 주변 눈치 보기가 몸에 밴 여자애.
아빠 눈치를 보며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했고,
엄마 눈치를 보며 다가가 집 안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도왔다.
갖고 싶은 인형이 있어도 문구사에서 물끄러미 쳐다만 보다 돌아왔고,
신발 한 켤레를 사더라도 금세 커버린 발가락이 아파서
물집이 잡힐 때까지도 암말 않고 신고 다녔다.

하지만 나는 내 동생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었다.
여덟 살이면 그런 것들을 몰라도 된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말썽꾸러기로 못 말리는 개구쟁이로 조금 더 오래 남아 있길 바랬다.

끙끙대며 고민하던 나는 저금통을 품에 안고 집 앞 문구사로 달려갔다.
학교 앞 해묵은 문방구와는 달랐다.
온실처럼 사방이 투명한 유리 벽으로 만들어진 세련된 문구사.
마치 유리로 만들어진 네모난 종합선물상자 같았다.

문구사로 들어간 나는, 단숨에 장난감 판매대로 달려갔다.
가쁜 숨을 내쉬며 제일 저렴해 보이는 미니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아줌마에게 미니카와 저금통을 내밀었다.

"이게 뭐니?"
"저금통에 있는 돈으로 이거 사려고요."
아줌마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아줌마는 저금통 철 뚜껑을 뜯어내고 계산대 바닥에 돈을 쏟았다.
"십 원짜리가 많네."
동전을 세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짐작으로 세어보니 아무래도 불안했다.

동전을 모두 센 아줌마가 말했다.
"얘, 이걸로는 많이 부족하구나."
"제일 싼 미니카도 못 사요?"
"응, 이거론 안 돼. 미니카가 얼마나 비싼데. 엄마한테 돈을 더 달라고 하렴."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아줌마는 내가 동생에게 선물한다는 걸 알고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잘 봐. 동전이 전부 다 합쳐서 삼천 원이 안 돼.
그렇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니까. 몇백 원쯤 아줌마가 보태줄게.
미니카 말고 다른 선물을 골라 보려무나."

나는 기쁜 마음에 두리번거리며 선물을 골랐다.
그때 은색 철 필통이 눈에 띄었다.
매끄러운 은색 철 필통 표면에 작은 기차가 조르르 그려져 있었다.
전부터 내가 가지고 싶었던 예쁜 필통이었다.
그 필통과 연필 한 자루, 캐릭터 지우개를 골랐다.
아줌마는 빨간색 별 포장지로 포장해서 금색 리본까지 달아주셨다.

크리스마스이브 밤. 동생은 일찍 잠이 들었다.
나는 몰래 가방에서 선물을 꺼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동생의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편지를 쓰면 내 글씨가 탄로 날까 봐 덩그러니 선물만 두었다.

훌러덩 배를 까고 자는 동생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도 목까지 이불을 끌어 덮고선 동생의 머리맡에 반짝이는 선물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두근두근. '메리 크리스마스.'
마음속으로 조그맣게 인사를 건네고 나는 잠이 들었다.
짤막짤막 이어진 꿈속에선 동생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동생은 머리맡의 선물을 발견했다.
우와! 소리를 지르며 포장지를 뜯는 동생.
"어? 이게 뭐야." 포장지 속의 은색 필통을 발견한 녀석은,
잔뜩 실망한 표정이었다.

"좋겠다! 산타클로스가 선물 줬나 보네."
"이거... 미니카가 아니잖아!"

녀석은 씩씩거리더니 선물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재빨리 필통을 주워 보니, 필통 모서리가 우그러져 있었다.
속상한 마음에 나도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끄러운 소리에 달려온 엄마에게 동생은 울면서 말했다.

"엄마, 산타클로스가 이상한 선물 줬어."
"응? 선물?"

엄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포장지가 반쯤 뜯긴 필통을 바라보았다.
"누가 준 거지?" 엄마는 우는 동생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거의 울 듯한 얼굴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시치미를 뚝 뗐다.
하지만 자꾸만 눈물이 치밀어 올랐다.

지켜보던 엄마가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어린애였다. 철든 척했어도 어쩔 수 없는 어린애였다.
잊지 못할 눈물의 크리스마스 아침이었다.

–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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