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말자구용

조회 1509 | 2016-03-2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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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
{요즘 너무나 아니한 화두로 나라가 엉망이다}
왜 그동한 나라와 가족을 위해 희생하신분들을
열받게 만드는지

단재 신채호는 1880년 충남 대덕군 출생,936년 만주국 뤼순 감옥에서 옥사 하였다.

언론인으로 본 신채호  1905년 을사조약 ~26세의 나이로 성균관 박사가 되지만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박

은식과 장지연의 초빙으로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에 이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침략 논리를

적극 비판하는 애국계몽운동의 실천적 지식인로서 명성을 떨친다. 

사학자로 본 신채호 일제가 식민통치를 합리화 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조작한 식민사관, 일제의 조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왜곡된 역사교과서, 신채호는 역사의식을 갖추는 것이 곧 애국심을 키우는 길이라고 믿고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 독사신론 과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체계를 수립한 조선상고사. 역사적 정통성과 자긍심을 일깨우는 민족주의 역사서를 저술하고 일제의 거짓 학설에 맞서 학문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독립운동가로 본 신채호는 1909년 안중근의 의거를 구실로, 일제의 탄압이 노골화하자

신민회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채호와 간부들은 독립전쟁론을 내새우며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형성과 국권피탈 이후 최대의 한민족 독립운동단체 권업회의 조직에 힘쓰고 권업신문의 주필로서 러시아와 중국의 한민족을 두루 계몽시켜, 명멸해 가던 민족 정신을 되살리고 권익을 지킨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기회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지만 미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했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이에 반발하여 반 임시정부의 노선을 걷는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 신채호는 창조파에 가담, 새로운 임시정보의 수립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고 창조파 임시정부 또한 해체되자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자금을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 뤼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2월 21일 옥중 순국한다. "왜놈이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광복 후 60여 년간 무국적자였던 신채호는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의 바람은 오직 하나 조선의 해방이였다.
 
나는 네 사랑 너는 내사랑
두 사람 사이 칼로 썩 베면
고우나 고운 핏덩어리가
줄줄줄 흘러 나려오리다
한나라 땅에 골고루 뿌려서
떨어지는 곳마다 꽃이 피어서
봄맞이 하리

-신채호 (한 나라 생각,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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