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의 고아원
19세기 말, 언더우드 선교사는 가난 속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세웠습니다.
하루는 한 남자가 고아원으로 4살 난 남자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는 귀양을 가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으나 아이를 돌볼 수 없었던 친척이
이곳에 맡기려고 데려온 것입니다. 언더우드는 아이를 맡아보려 했으나
너무 어린 나이의 아이를 돌볼 상황이 되지 못해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얼마 후 아이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걱정이 되어 아이를 찾아갔으나 아이의 병세는 더욱 심해져
생명이 위독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간호했습니다. 아이는 점차 기력을 찾았고,
그의 집에 머물면서 공부도 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놀라울 정도로 명석했습니다. 특히 그의 영어실력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언더우드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미국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고,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귀국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청년은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임시정부의 대표로 참여했으며
해방 직전에는 임시정부 부주석으로 김구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를 이끌었습니다.
해방 후에도 통일 운동을 힘썼던 우사 김규식 선생의 생애는
이처럼 언더우드 선교사의 사랑으로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사랑은 희생의 가치를 가르쳐 줍니다.
이처럼 대한민국 독립의 역사에는 많은 이들의 사랑과 희생이 담겨있습니다.
류 완 / 집필위원
*** 지하철 사랑의 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