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본동댁

조회 1356 | 2015-07-1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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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구쟁이 두 아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서로를 아끼며 단란하게 살아가고 있는 가정주부이다.
남편은 아이들에게 다정한 아빠이자,
나에게도 늘 웃음을 주는 유머감각이 있는 남편이다.
아이들은 또래 보다 제 할 일을 스스로 찾아 할 줄 알고
예의가 바른 편이라 걱정이 없다.
우리 집은 그야말로 행복이 가득한 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시골에 홀로 계신 엄마가 3일을 굶어 쓰러진 채로 발견된 것이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일에 집안일까지 정정하게 하시던 엄마인데.
무슨 까닭인지 몰라 시골집으로 가는 내내 가슴을 졸였다.

억척 엄마. 엄마는 그랬다.
아들 넷, 딸 넷을 혼자 몸으로 키우느라 밤낮없이 일만 했다.
일찍 남편을 떠나 보낸 후,
시골에서 품을 팔아가며 8남매를 올곧게 키워내는 것,
그것이 엄마 인생의 목표였다.
쉼 없는 노동.
그 대가로 엄마는 농사지을 땅을 소유했고
자식들이 머물 수 있는 집을 가졌으며 8남매 모두 잘 성장했다.

이제 인생의 즐거움을 누려야 할 때, 엄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그토록 강인한 정신력의 엄마에게 치매가 왔다.
자식들이 모두 떠나가고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셨던 걸까?
나는 엄마를 그냥 둘 수 없어 집으로 모시고 왔다.
엄마에게는 일곱 번째 자식이지만 그냥 내가 모시기로 했다.
너무 늦게 엄마의 고통을 알게 되어 죄스럽기만 하다.
다행히 남편은 아픈 장모님을 집으로 모시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오히려 엄마를 나보다 더 살갑게 대하며 가슴으로 껴안는다.
역시 멋진 내 남편이다.




그렇게 3년이 흘렀다.
우리 집의 아침 풍경은 언제나 비슷하다.
아이들을 챙기고 남편도 살뜰히 챙겨 출근시키고 나면
엄마가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아이가 되어버려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엄마.
40년 전 엄마가 아기인 나에게 해준 것처럼 아기가 된 엄마를 돌본다.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화장실에 시간 맞춰 데리고 가고.
아직은 엄마가 내 이름을 불러주니 다행이다.
언젠가는 그마저도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 같아 겁이 난다.

"승애야, 지금 나가야 하는디."
"엄마, 어디 가고 싶은데?"
"송광굴에 가서 일해야 혀."
"무슨 일... 이젠 안 하셔도 돼."
"콩도 심고 밭도 갈고."

엄마에겐 땅(송광굴)이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 땅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나왔다.
그곳에서 거둔 것들로 8남매를 먹이고 키워냈다.
땅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러니 매일 돌보러 나가고 일해야 하는데, 그 땅이 이곳엔 없다.
엄마는 창 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보며 안절부절못한다.
그 땅에 건물이 들어서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올해 일흔일곱 살 김종례. 엄마는 '본동댁'이라고 불린다.
한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평생을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할 일이 없다는 건 평생을 노동으로 살아오신 분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그래서 평일 낮 동안 치매노인보호센터로 보내드린다.
엄마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엄마, 그곳에 가서 일하면 하루 7천원에서 만 원 정도 버니까,
돈 벌러 가시는 거야. 알았지?"
"그럼, 일해야지. 일해야 돈을 벌지."

당뇨, 고혈압에 관절염까지 겹쳐 한 움큼씩 약을 드셔야 하는
불편한 몸으로 엄마는 기꺼이 일하러 가신다.
엄마는 그 시간이 즐겁다.

엄마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우산댁'이라 한다.
'우산댁'은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나에게는 외할머니다.
외할머니가 살아 돌아오셨다고 믿는 엄마.
엄마는 거울을 보며 외할머니 끼니를 챙겨드렸냐고 묻는다.
물론 나도 식사를 잘 챙겨드렸다고 응수한다.
엄마에게 가장 그리운 사람은 외할머니였을까?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다.
엄마도 언제나 엄마의 품을 그리워하며 보고 싶어 하셨을 테지.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닫는다.

처음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 엄마는 영원히 건강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내 기억 속에서 엄마는 강하고 엄한 분이었다.
그런 엄마였는데, 한순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시간 날 때마다 장모님 옆에 나란히 누워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껄껄거리는 남편과
사위 앞에서 수줍은 듯 입을 가리고 웃는 엄마,
그리고 자신들보다 할머니에게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두 아들에게서 힘을 얻었다.
엄마는 불청객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었고
그 변함없는 사실은 우리 가족을 더 끈끈하게 이어주었다.




명절이 되어 고향집으로 가는 길, 쉬지 않고 5시간을 내리 달린다.
벌교 집에 가족들이 모두 모였다.
이번이 여기에서 보내는 마지막 명절이다.
엄마는 본동으로 돌아와 즐거운지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부엌에선 며느리들과 딸들이 설음식 준비로 부산하다.
몇 년 전만 해도 명절이면 엄마가 주방의 수장으로
호령하며 음식 준비를 도맡았는데,
이제는 멀찍이 떨어져 물끄러미 부엌을 바라보신다.
아내로 엄마로 새벽부터 밤까지 노동으로 살아온 인생.
그 고단한 인생의 끝에서 치매를 만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예전부터 남편은 명절이 끝나고 돌아갈 때면 가장 늦게 올라가자 했다.
많은 가족이 붐비다가 홀로 남으실 장모님 생각에 발길이 안 떨어진다 했다.
손수 농사지은 먹거리를 잔뜩 싸주시며 잘 지내라는 말을 연거푸 하시는
장모님의 외로운 웃음을 보기가 힘들다 했다.
혼자라는 사실 앞에서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오늘도 엄마는 나갈 문을 찾아 온 집 안을 빙빙 돈다.
콩을 심어야 할 때라고 밭에 나가봐야 한다는 엄마.
이어지는 실랑이에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릴 방법을 궁리하다가
슈퍼에 가서 흰 콩과 검은 콩을 사왔다.
한데 섞어 엄마 앞에 내려놓는다.
엄마는 흰 콩과 검은 콩을 따로 담느라 손을 부지런히 놀린다.
할 일이 생겨 집중하는 엄마.
색깔 별로 잘 고르시다가도 흰 콩이 검은 콩 그릇으로 가기도 하고
검은 콩이 흰 콩 그릇으로 가기도 하고, 끝이 없다.
콩 고르기는 엄마의 큰 일감이 되었다.




올 봄 초등학교에 입학한 작은 아들은 할머니가 오신 후부터 예민해졌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할머니 존재때문에 힘든가 보다.
그래도 아이들은 할머니가 오신 후에 달라진 삶을
오히려 어른보다 잘 받아들였다.
그런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좀 더 신경 쓰지 못해 속상하지만
이런 부모의 모습을 보며 잘 성장하리라 믿는다.

오늘은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처음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왔을 때는 30점 중 16점이었는데,
지금은 7점으로 더 안 좋아지셨다.
첫 검사에서 이미 중증이었지만 정성으로 보살펴드리면
나아질 거라 믿었는데 현실은 내 편이 아니다.
뇌 부피가 더 작아졌고 언제 시설로 보내드려야 할지
이제는 생각해봐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가슴에 와서 박힌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부족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더 이상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으니 더욱 가슴이 아프다.

엄마와의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까?
엄마는 아직 딸을 잊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 이름과 얼굴을 잊을 때가 올지도 모른다.
존재가 지워지는 날, 그날이 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길 수 없는 싸움.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
하지만 오래도록 할 수만 있다면 그 싸움을 계속 하고 싶다.

내 곁에 오시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엄마와 함께할 수 있어 행복하다.
엄마는 여전히 우리 엄마고 나는 그녀의 딸이다.
엄마와 나의 시간은 오늘도 흐른다.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엄마 옆에 내가 있고 내 옆에 엄마가 있기에,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기에,
우리 집은 행복이 가득한 집이다.

- MBC 휴먼다큐 사랑 10년의 기적 '지금, 사랑'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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