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우울증

조회 2746 | 2013-10-28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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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우울증 우울할 일 많은 십대, 하지만 스트레스 때문만은 아니에요

십대의 우울은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생기는 당연한 결과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출처: corbis>

“너 왜 우니?” 엄마는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미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학원에 다녀와서 배가 고프다기에 밥을 차려주었을 뿐인데 별안간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나 학원에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밥을 입에 넣으면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하던 아이가 결국 수저를 놓고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아이를 쫓아가서 물어보아도 베개를 뒤집어쓴 채 나가라고만 할 뿐이었다. 미희는 다음 날에도 아무 말 없이 학교에 갔다. 이러기를 벌써 한 달. 걱정이 되어 담임선생님이나 미희와 친한 친구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들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엄마는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미희는 요즘 학교에 가는 것이 갈수록 힘들고 괴롭다. 친구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것도 힘에 부친다. 종일 멍하고 집중이 되지 않아 수업 시간에도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지,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며 노는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대화 주제가 바뀌어 있어 뒷북이 되기 일쑤다. 머리는 멈춰버린 것 같고, 밤에는 잠도 오지 않고, 자꾸 나쁜 생각만 떠올라 무서운데 엄마에게 말하면 걱정하실 게 빤하니 말을 할 수도 없다. 내가 이상해진 것만 같다. 심지어 어떤 때에는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어 아찔할 때도 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걸까?

십대의 우울증, 존재하는가?

 

미희는 우울증에 빠져 있다. 지금이야 우울증이라는 말이 워낙 흔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앓는 하나의 트랜디한 문화 정도로 여겨지지만, 50년 전만 해도 소아나 청소년들은 우울증에 걸릴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감정과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 우울증의 주요 증상인데,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발달하지 않은 나이에 그런 복잡한 개념적 사고를 할 수 없으니까, 우울증에 걸릴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아나 청소년들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이후 의학이 발달하면서 신체의 변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다가 1980년에 미국 정신과 진단분류체계인 DSM-III에 소아 우울증이 포함되면서부터 그 존재가 인정되었다.

아이가 우울해하고 힘들어할 때 아이들은 일상적인 스트레스에 대해 엄살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뇌가, 마음이 아픈 것이다. <출처:gettyimages>

십대의 우울은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생기는 당연한 결과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흔히 부모들은 아이가 우울해하고 힘들어할 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기보다 “네가 뭐가 힘들다고 그래? 잠잘 데가 없니, 밥을 굶기니? 엄마, 아빠가 더 힘들어”라고 말하면서 덮어두거나 무시하기 쉽다. 하지만 아이들은 일상적인 스트레스에 대해 엄살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뇌가, 마음이 아픈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울증이란 그저 기분이 우울한 것이 아니라 ‘병으로서의 우울증’을 의미한다. 정신질환으로서의 우울증은 뚜렷한 생리적 변화를 동반한다. 단순히 기분이 우울하고,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삐딱한 태도를 갖거나 대인관계가 소극적이 되는 것을 두고 주요우울증이라 진단하지 않는다. 2주 이상 흥미가 저하되고 우울한 감정이 뚜렷하게 지속되면서 수면, 식욕,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변화를 보일 때 주요우울증이라 진단할 수 있다.

즉, 우울증이란 생리학적 변화가 수반된 몸과 마음의 총체적 문제이다. 초등학생 시기에는 남녀 비율이 비슷하거나 남자가 주요우울증에 더 많이 걸리는데 약 2% 정도로 추산한다. 그러나 청소년기가 되면 그 비율이 5%까지 증가하고 남녀 비율에서도 뚜렷한 차이가 발생해 여자가 3대 1로 더 많아진다. (우리나라는 2005년 역학조사 결과 전체 고등학생의 2.1% 정도로 발견되었다) 이런 변화의 원인은 스트레스를 인지하고 해석하는 방법의 차이와 2차 성징 때문인 것으로 해석한다.

그림1. 연령에 따른 DSM-IV 3개월간의 우울증 유병율 변화(Angold 2006, Child & Adolescent Psychiatry Clinical North America 15: pp 919-937에서 변형하여 수록)

그림1에서 보듯 12~13세를 지나면서 여자 아이들이 우울증 진단을 받는 경우가 확연히 늘어난다. 여성의 경우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서 난소에서 성호르몬이 분출되기 시작하는데, 생리 주기에 따라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이 급격히 분비되었다가 줄어드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래서 십대에 배란통, 생리통과 같은 불쾌한 증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끝이 아닌 사람도 있다. 이러한 호르몬들이 분비될 때 뇌의 특정 부위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외부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교한 기계와 같다. 한 달 간격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특정한 호르몬이 있다면 안정적인 환경에서 지내던 뇌가 얼마나 놀라겠는가? 금방 적응하거나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뇌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뇌가 우울증에 취약한 뇌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을 가진 뇌라고 할 수도 있다.

생리주기는 출산이라는 중요한 사명을 가진 여성의 신체 구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안고 살아야 하는 시스템이다. 그 덕분에 여성들은 십대에 한 번, 임신과 출산, 산후우울증을 겪는 20~30대에 또 한 번, 50대 이후에 생리주기를 마감하면서 다시 한 번 몸과 마음이 세팅되면서 급격한 감정 변화와 우울증을 겪게 된다. 남성들은 이런 수고를 하는 여성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제 십대 여자 아이들이 겪는 우울 증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생리주기에 따라 주기적인 변화 양상을 보일 수 있다. 배란기부터 우울 증상이나 짜증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감정의 기복도 점점 심해진다. 그러다가 생리가 시작된 다음 날부터 신기할 정도로 기분이 나아진다.

슬프고 비관적인 생각에 빠져 있기보다는 집중력이 떨어져서 멍해 보이고 반응이 느려진다. 생각은 하지만 몸이 따라오지 않아 상대방의 말을 쫓아가기 어렵고, 딴 생각을 하다가 뒷북을 치기도 한다. 남들이 볼 때는 어딘가 굼뜨고 멍해 보이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다. 감정조절이 어려워져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한번 눈물이 흐르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고, 멈추기도 어렵다. 잠이 지나치게 많아져서 자도자도 피곤하거나, 밤에는 잠이 전혀 오지 않고 아침에는 일어나기 힘들어진다. 식욕이 뚝 떨어지거나 국수나 빵과 같은 탄수화물, 혹은 피자나 햄버거 같은 기름진 음식을 폭식해도 포만감이 오지 않고, 지속적으로 허기를 느껴 체중이 급격히 늘어나기도 한다.

십대 여자 아이들의 경우 생리주기에 따라 우울 증상이 주기적인 변화 양상을 보일 수 있다. <출처: gettyimages>

이러한 변화는 십대의 복잡하고 힘든 생활 스트레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식욕, 수면 패턴의 변화 등은 분명 뇌기능에 기반한 결과이다. 그러니 “너희 나이 대에는 누구나 힘들고 우울해”라고 넘겨버려서는 안 된다. 가만히 둔다고 좋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오래 방치해 자칫 만성화가 되면, 자아정체감의 형성에도 상처를 줄 수 있다. ‘나는 못난 아이’, ‘아무도 나를 좋아해주지 않아’라고 자신을 규정해버리고, 그런 생각과 판단, 삶의 태도가 습관이 되어 우울 증상이 좋아진 뒤에도 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다. 또한 성인이 되었을 때 주요우울증이 재발해서 건강한 성인으로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부모와 십대들은 우울증의 증상을 잘 이해하고, 이런 변화를 누구나 겪는 문제, 가만히 두면 자연스럽게 좋아질 것으로 보기보다 시급히 치료받아야 할 것으로 보려는 관점이 필요하다.

자, 미희처럼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이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치자. 주변에는 그 정도 까지는 아니지만 우울한 느낌과 생각을 갖고 다소 처진 상태에 있는 십대가 아주 많다. 이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학업 문제, 친구 문제, 부모와의 문제가 발생할 때 이들은 꿋꿋이 헤쳐 나가기보다 세상을 한탄하고, ‘비뚤어질 테다’라며 화를 내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더 좌절하고 힘들어한다. 생활은 엉망이 되기 일쑤다.

우울에서 벗어나 건강한 리듬으로 돌아가려면

 

이런 상황에 빠진 십대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건강한 리듬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난 무엇보다 작은 행동부터 바꾸어보자고 한다. 거창한 변화를 추구하기에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들고, 괴롭다. 에너지가 많지 않고, 성공의 경험도 적은 사람이라면 금방 지쳐서 포기하기 쉽다. 그러니 먹고 자는 것처럼 지극히 사소하지만 실천하기 쉽고 확실한 것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밤에는 잠을 자고, 아침에는 일정한 시간에 일어난다. 별 것 아닌 것이 오래 지속되면 탄탄한 울타리가 되어 나를 지켜준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삶의 리듬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출처: gettyimages>

‘등 따습고 배부르면 장땡’이라는 옛말이 있다. 일단 잘 먹고 잘 자는 것부터 시작하자. 지금 십대들은 학원 때문에 먹고 자는 시간이 무척 불규칙적이다. 만일 지금의 마음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아슬아슬한 불안감이 들고, 이러다가 깨져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긴다면? 또 부모와 충돌이 잦고, 생활습관도 쉽게 흐트러지는 것 같다면? 개인의 의지력으로 극복하는 것, 부모와 깊은 대화를 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것, 심리 상담을 받는 것, 모두 좋다. 그러나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먹고 자는 습관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밤에는 잠을 자고, 아침에는 일정한 시간에 일어난다. 아침식사는 거르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식구들이 아침식사 한 끼라도 같이 하는 습관을 만든다. 별 것 아닌 것 같다고? 별 것 아닌 것이 오래 지속되면 탄탄한 울타리가 되어 나를 지켜준다. 모든 변화의 시작은 삶의 리듬을 정상화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익숙해진 다음에 생활의 페이스 조절, 친구나 부모와의 소통 문제, 학업 스트레스의 수위 조절을 해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생리적 변화를 포함한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일정 기간 이상 이어질 때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는 점을 십대와 부모가 함께 이해하는 것, 그리고 만일 문제가 발견된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얻거나 치료를 받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 그것이 더 길고 깊은 마음의 상처가 생기기 전에 우리가 할 일이다.

하지현/건국대학교 병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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