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대의 청개구리 심리

조회 2164 | 2013-10-2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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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의 청개구리 심리 부모가 맞는 답을 말하면 안 되는 이유

왜 아이들은 십대가 되면 부모의 제안에 다짜고짜 “싫어”, “몰라”, “안 해”라는 말부터 하는 것일까? <출처: gettyimages>

엄마는 이식이의 수학 성적이 떨어져서 걱정이다. 수학에 소질이 있는 편이라 지금까지는 혼자서도 잘해왔는데,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확실히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학원을 보내지 않고 혼자 공부하게 두었는데, 이제는 도움을 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식아, 이번 여름 방학에는 수학 학원을 다니면 어떨까? 성적이 많이 떨어져서 엄마는 걱정이 많이 돼.”

이식이는 영어 학원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해 수업이 끝나고도 남아서 숙제를 하다가 왔던 터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가뜩이나 지치고 배고픈 상태로 집에 왔는데, 엄마는 다짜고짜 여름 방학 때 다닐 학원 계획부터 말하니 짜증이 났다.

“몰라, 그냥 영어 학원만 다닐래. 수학은 알아서 할게”
“이식아, 너 어쩌려고 그래? 이러다가 수학은 반에서 중간도 못해. 초등학교 때 경시대회 나갔던 실력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줄 아니?”
“아이 씨,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배고파! 밥 줘!”

이식이는 문을 꽝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이식이도 수학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여름방학 동안 수학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먼저 저렇게 치고 나오니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면서 안 하겠다고 해버린 것이다. 엄마도 요즘 이식이의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분명 지금 시점에서는 수학에 신경을 쓰는 것이 맞고,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식이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라고 엄마는 생각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삐딱선을 타는지 모르겠다. 요즘 아들을 보고 있으면 내 뱃속에서 나온 저 아이가 사람이 아니라 사실은 청개구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된다. ‘내가 죽어서 물가에 묻혀야 정신을 차릴까’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십대는 청개구리?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부모가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 따른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몰라도 엄마 아빠가 시키는 일이니 옳은 것이라고 여겼다. <출처: gettyimages>

왜 아이들은 십대가 되면 부모의 제안에 다짜고짜 “싫어”, “몰라”, “안 해”라는 말부터 하는 것일까?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는 부모가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 따른다. 왜 그래야 하는지 몰라도 엄마 아빠가 시키는 일이니 옳은 것이라고 여겼다. 또한 부모의 지시를 잘 따르는 것이 사랑과 인정을 받는 길이기도 했다. 하지만 십대가 되면 달라지기 시작한다. 부모가 제안하는 방법이 가장 적절한 답이라 생각해도 일단 짜증이 솟구치고, 부모가 제시하는 답은 답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말이라면 “하늘이 파랗다” 해도 “꼭 그렇다는 보장이 어딨어요? 빨갛게 보이는 사람도 있죠”라며 말꼬리를 잡고 싸우기도 한다. 이러니 부모 입장에서는 십대 자녀와 말다툼을 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건 단순한 논쟁이나 토론의 문제가 아니라 십대의 발달 과정에서 꼭 거쳐갈 수밖에 없는 중요한 단계가 개입된 일이기 때문이다.

제2의 분리-개별화 과정의 시작

 

청소년기에서 가장 중요한 발달 과제를 꼽으라면 ‘정체성의 형성’이라 하겠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나만의 나’라는 개념을 내 안에 탑재하는 일이다. 물론 이 문제는 어른이 된다 해도 여전히 삶의 화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다른 내가 되어야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생기는 것은 청소년기 때부터이다. 그동안 아이의 마음 안에 있는 삶의 태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기준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부모가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라는 것을 잘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실 부모가 제시하는 대부분의 판단 기준은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사회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올바른 것들이기도 했다.

정체성은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나만의 나’라는 개념을 내 안에 탑재하는 일이다. <출처: gettyimages>

하지만 십대가 되고 ‘나만의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이 강해지면서 문제가 생긴다. 그때 아이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동안 나는 뭘 하면서 살았지? 지금껏 엄마 아빠가 하라는 대로만 살아왔잖아. 그러니까 나는 엄마 아빠의 복제인간이나 다름없었던 거네.’

아이들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한다. 하루라도 빨리 나만의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조바심이 이성적인 판단을 흔들어댄다. 그 시작은 부모나 선생님이 그동안 제시해온 기준들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어서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정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들조차 부정하고 따르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선은 일상 속에서 실시간으로 발생하는 일들의 판단 기준에 대해 전면전을 시작한다. 부모가 제시하는 답에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여부는 나중에 판단해도 되니, 일단 아니라고 말하고 본다.

밖이 추우니 긴 옷을 입고 나가라고 하면 밖에서 달달 떠는 한이 있어도 반팔 옷을 골라 입는다. 우산을 갖고 가라고 하면 일부러 두고 나간다. 평소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같이 보자고 해도 “나 그거 싫어해”라며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 외식을 하러 가면서 탕수육을 먹자고 하면, 평소 좋아하고 먹고 싶은 음식이었다 해도 “싫어, 깐풍기 먹을래”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아이도 괴로워한다. 이성적으로는 분명히 긴 옷을 입고, 우산을 들고 나가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부모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일단 아니라고 하고, 부모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서 부모의 울타리 밖에 자기 영역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무척 괴로운 일이지만,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행동하도록 이끈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니 부모는 괴로울 따름이다. 아이가 갑자기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고, 합리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니 말이다. 아이가 사춘기가 되더니 미친 것이 아닌가 싶다는 하소연도 하게 된다. 분명히 이게 답이고, 이렇게 하는 게 옳은데도 아이는 막무가내로 아니라고 하니 말이다.

이성보다 감정이 먼저 반응하는 십대

 

이와 같은 변화는 뇌의 발달과도 연관이 있다. 뇌에는 감정을 처리하고 공포나 공격적 행동을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편도(amygdala)라는 부위와, 이성적 판단을 하고 충동을 억제하는 전두엽(frontal lobe)이라는 부위가 있다. 십대의 뇌를 보면 편도는 일찍 발달하고, 전두엽은 상대적으로 늦게 발달한다. 그래서 문제를 판단하고 결정할 때 십대의 뇌는 성인의 그것과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감정을 다루는 편도가 전두엽보다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반응하고, 사회적 단서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거나 오해하고, 이성적 단서들보다 감정적 태도에 따라 반응과 판단의 방향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하버드 의과대학 맥린 병원에서 이와 관련한 실험을 했다. 십대와 성인을 대상으로 인물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중 공포 반응을 보이는 얼굴을 찾게 하면서 동시에 기능성 MRI 로 뇌의 활동도를 관찰했다. 성인은 정확하게 공포 반응을 보이는 얼굴을 찾았고, 이때 성인의 뇌에서는 이성적 판단을 하는 전두엽이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십대의 경우는 전두엽이 아닌 편도가 활성화되는 것이 기능성 MRI에서 관찰되었다. 감정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정확한 답을 일관성 있게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정체성 찾기 여행을 시작한, 감정적인 십대와 대화하는 법

 

십대는 지금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감정이라는 물결에 휩쓸려 쉽게 출렁이고 흔들린다. 이런 십대와 이성적 대화를 하면서 합리적 결론을 내리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부모들이 이런 태도를 가졌으면 한다.

십대는 지금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감정이라는 물결에 휩쓸려 쉽게 출렁이고 흔들린다. <출처: gettyimages>

첫째, 답을 너무 빨리 말하지 않는다. 아이는 지금 일부러 반항하려고 부모의 제안을 무조건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부모가 제시하는 것들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제안이 비록 옳고 확실한 답이라 할지라도 십대에게 답을 얻는 것보다 더 소중하고 중요한 목표는 내 것을 만드는 것이다. 부모는 이런 아이의 심리를 이해하고, 부모 자신의 결정이 누가 봐도 분명한 해답이라 해도, 먼저 제시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자칫하면 아이가 뻔히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일부러 제3의 답을 고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걸 우기다가 나중에 후회하거나, 피해를 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둘째, 그러니 가끔은 일부러 틀린 답을 제시해보라. 황당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십대들의 현재 마음 상태와 판단의 우선순위를 고려하면 납득할 수 있다. 만약 맞는 답을 제시해서 아이가 받아들이면 아이 입장에서 그 결정은 부모의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다.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품 안에서 복제품으로 살아가는 인생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러니 부모의 뜻을 따르면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부모의 권위에 굴복했다고 여기기 쉽다. 이런 갈등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부모가 생각하기에 틀린 답, 혹은 최적의 상황은 아닌 답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답이 틀린 것을 알고 “그건 아니에요”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주도권을 쥐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때 자기 입으로 부모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 답을 찾아가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부모 입장에서는 조바심이 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가 최선의 해답을 찾아낸다면? 그때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부모를 뛰어넘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옳은 결정을 했다고 여기며 자기 힘으로 자기 세계를 만들어냈다고 인식한다. 그러니 그 결정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지켜나가려고 애를 쓸 것이다. 부모가 시키는 일을 그저 따라 하면서 수동성을 보이던 때와는 질적으로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어린아이일 때와 달리 십대 아이와 대화하고 결정을 내리는 과정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때부터는 잘 져주는 것이 오히려 나은 양육일 때가 많다.

셋째, 아이는 일차적으로 감정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감정적으로 불쾌하거나 짜증이 났을 때, 혹은 피곤한 상태일 때 판단하도록 제시하지 않아야 한다. 어른들도 그런 상황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어렵지 않은가. 십대는 더욱더 감정적으로 반응했다가, 나중에 번복하지도 못하고 그냥 밀어붙이기 쉽다. 아이의 이성적 판단 능력은 십대가 되면 충분히 잘 작동하지만 감정적으로 판단하는 성향이 워낙 강렬하기 때문에 이성을 압도하기 쉽다. 그러므로 감정이 충만해 있거나 예민할 때보다는 안정적이고 평온한 상태일 때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런 십대의 심리 상태를 이해하면서 대화의 타이밍을 잡는 것이 좋다.

아이가 자기 입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자. 부모가 생각한 최선의 답은 아닐지라도 아이가 한 결정이 최악이 아니라면 존중하고, 기다려보자. <출처: gettyimages>

마지막으로 아이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아이의 마음속은 지금 복잡하다. 감정에 휩싸이기도 하고, 부모와 자신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중차대한 문제도 판단을 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성적이고 안정적인 부모의 관점에서 볼 때는 별다른 고민거리가 아닌 일로 아이가 꾸물거리고, 반항의 눈빛을 보이며 망설일 땐 당연히 답답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때 아이는 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그것과 다른 추가 변수들이 개입해 있기 때문에 복잡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기다려주자. 그리고 아이가 자기 입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자. 부모가 생각한 최선의 답은 아닐지라도 아이가 한 결정이 최악이 아니라면 존중하고, 기다려보자. 그래서 그것이 최선의 답이 되도록 함께 노력해보자. 선택의 시발점에서 우리는 무엇이 최선인지 알 수 없다. 무엇이 최선의 결론인지는 결승점에 가봐야 확인할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설득할 수 있는가’이다. 아무리 최선인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왜 하는지 모르고 하는 것은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렵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라는 믿음과 결심이다. 그것이 있어야 지속적으로 해나갈 수 있고, 아이 또한 결국 그 결정이 최선이었다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커진다.

이처럼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조마조마한 불안을 견뎌내는 힘든 작업이다. 때로는 져주기도 하고, 때로는 일부러 틀린 답을 내면서 아이가 심리적으로 독립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인 것이다.

하지현/건국대학교 병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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