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본업은 신나게 놀기

조회 1815 | 2014-02-2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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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본업은 신나게 놀기
어쩌다 강의가 없는 날, 아파트 베란다에서 단지를 내다보면 참으로 요지경이다. 영어학원, 창의력학원, 미술학원, 태권도학원, 놀이학교 등등 종류도 다양한 학원버스가 단지 내로 들어와 부지런히 아이들을 실어 나른다. 어떤 아이는 아예 집에도 안 들어가고 주차장에 서 있다가 또 다른 학원버스에 몸을 싣기도 한다. 그런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절로 든다. 한창 신나고 활기차야 할 아이들 얼굴에 고단하고 지친 어른의 표정이 숨어 있다.

몇 년 전 논문 때문에 유치원생들의 과외 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었다. 강남 지역 유치원생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아이들이 대부분 3~5개에 이르는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결과가 나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일주일에 무려 8개에 이르는 과외를 받는다는 아이도 있었다.

내가 우스개로 잘하는 말이 있다. ‘시어머니 직업은 며느리 들볶기, 대학생의 직업은 공부, 그리고 아이들의 직업은 신나게 놀기다’. 정말 그렇다. 아이들은 신나게 노는 게 일이다.

아이들이 직업, 그러니까 노는 일에 소홀하고 과외나 학습 등으로 바쁘면 여러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한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정서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어떤 기분인지,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아이 스스로 인지할 틈이 없다. 이것은 정서가 성숙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현재 정서 상태와 기분마저 인지하지 못하면서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울 수는 없다.

두 번째 문제는 궁리하고 생각할 틈이 없다는 데 있다. 엄마들이 요즘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바로 ‘창의력’이다. 그런데 이 창의력이라는 건 틈, 여유에서 나온다. 광고회사에서는 직원들을 위해 화장실에 특별히 신경을 쓴다는데, 그 이유는 화장실에서 기발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오기 때문이란다. 변기 위에 멍하니 앉아 있는 5분 동안은 광고회사 직원들에게는 그야말로 창의력이 퐁퐁 샘솟는 시간이다. 해결해야 할 일에서 한걸음 물러서 있을 때, 머릿속에 여유와 틈이 생겼을 때 비로소 창의력이 생긴다. 그런데 엄마들은 어떤가. 창의력을 길러준답시고 창의력학원이라는 데를 보낸다. 아이에게 심심할 틈을 줘야, 빈둥거릴 기회를 줘야 창의력이 길러지는데 오히려 바쁘고 정신없이 몰아대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문제는 학습한 내용을 자기 것으로 소화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 남녀를 불문하고 근육 만들기 열풍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근육은 운동할 때 생기지 않는다. 운동을 한 후 쉬는 동안에 생긴다. 그래서 근육을 만들려면 운동 못지않게 휴식도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이 원칙은 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아이가 학습한 내용을 뇌에 저장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은 책상머리에서가 아니라 뇌가 쉴 때 이루어진다. 이 틈을 주지 않고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끌고 다니기만 하면 주워들은 건 많아도 머릿속에 남는 건 하나도 없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성과는 없는, 말 그대로 헛수고인 셈이다.

아이들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가장 큰 부작용은 바로 엄마가 아이를 관찰하는 데 소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엄마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정해진 대로 영어학원, 수영, 미술학원을 거쳐 집에 돌아와 숙제까지 마치면 무조건 안심한다. 정작 아이와는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보지도 못했으면서 아이는 잘 자라고 있다고 멋대로 판단한다. 하지만 앞 장에서 이야기했듯 아이들의 심각한 문제행동은 언제나 조용히 시작된다. 차라리 말썽을 부리고 반항하는 아이는 그나마 나은데, 얌전하고 순응적이던 아이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순식간에 충격적인 사건을 저지르곤 한다. 이런 경우 부모들은 대부분 자기 아이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다 뒤늦은 후회를 한다. 얌전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겉모습 뒤에 숨은 슬픔, 분노와 폭력성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심해야 책도 읽고 공부도 한다
유엔이 정한 아동인권선언문 제31조에는 아이에게 적절한 휴식과 여가생활을 즐길 권리가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기에 역행하고 있다. 아이의 장래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부모가 아이의 시간을 통제하고 휴식을 즐길 권리를 빼앗고 있다. 부모들은 대부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엄연히 말하면 이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이자 학대다.

어쩌다 학회 일로 유럽에 나갈 때면 나는 그들의 교육환경이 부럽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한다. 그 나라 아이들은 학교 수업을 마치면 연극이든 축구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루를 보낸다. 우리 아이들처럼 과중한 숙제도, 연달아 가야 하는 학원도 없다. 놀이터마다 삼삼오오 모여 마음껏 노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놀아야 하는 본업에 충실한 아이들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늘 시간에 쫓긴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어쩌다 자유시간이 주어져도 무얼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한다. 어떤 엄마가 큰마음 먹고 아이들을 데리고 전주 한옥마을로 여행을 갔다고 한다. 엄마는 아이들이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생전 처음 보는 한옥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할 줄 알았단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심심하다며 당장 집에 가고 싶다고 난리를 부리더란다. TV도, 인터넷도, 게임기도 없는 곳에서 아이들은 단 10분도 견디지 못했다.

건강한 아이들은 심심하다는 걸 모른다. 세상 모든 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난감이다. 돌멩이도 구름도 냄비뚜껑도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놀잇감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루를 바쁘게 보내며 쉴 틈이 없다 보면 노는 방법까지 잊어버린다. 장난감이 없으면, 게임기가 없으면 놀지 못한다. 오죽하면 ‘장난감 중독증’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을까.

몇 년 전, 한 신문에 세 아이 모두를 전교에서 내로라하는 우등생으로 키운 엄마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 집 아이들은 학원이라면 문턱에도 가본 일이 없다고 했다. 학교가 끝나면 무조건 집으로 와서 그냥 놀았다는 것이다. 친구들은 모두 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함께 놀 상대가 없었다. 별 수 없이 세 아이들끼리 똘똘 뭉쳐 놀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에는 노는 데 물려서 책을 읽고 공부를 하더란다. 그 엄마 말이 걸작이었다. “아이들은 심심할 틈이 있어야 책도 읽고 생각도 하고 공부도 한다.”
해야 할 일이 없는, 순수하게 자기만을 위한 시간이 우리 인생의 자양분이 되는 것처럼 아이도 마찬가지다. 자유 시간을 주면 쓸데없이 TV나 보고 오락이나 할 거라고 생각할 게 아니다. 자유 시간도 써본 아이가 알차게 쓴다. 자기 조절 능력을 길러주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연습을 시키기 위해서라도 아이에게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권리를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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