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야, 어디서든 말조심해라. 위험한 덴 절대 가지 말고. 요즘같이 무서운 세상에는."
오늘(11일) 아침 여느 때처럼 감기 조심하시라며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낼모레면 팔순인 노모께서 다짜고짜 이 말을 건넸다. TV 뉴스를 통해 전북 익산의 '토크 콘서트장 폭발물 투척 사건'을 접하고 꽤나 놀라신 모양이다. 더욱이 고등학생의 소행이라고 하니, 당장 그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늦둥이 막내아들이 걱정되더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아들이 한국사 교사라는 걸 알고 계신다. 특히 '시험에 거의 출제되지 않는' 광복 이후 6·25 전쟁까지의 역사에 외골수처럼 천착하며, 학교 안팎으로 현대사를 강의하러 다니고 있다는 걸 들으시곤, 뵐 때마다 입버릇처럼 '몸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달고 사신다. 고3 시절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당신께서 극구 말리셨던 걸 새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자식이 역사를, 그것도 현대사를 공부하겠다는 건, 당신에겐 '위험천만한' 일이다. 어머니께선 전남 순천에서 나고 자란 까닭에 광복과 6·25 전쟁 즈음의 기억은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함'으로 남아있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냈고, 철든 후에도 여순 사건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그저 살아남는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위대한 일'인지를 체화하신 분이다.
이태 전 가족 소풍 삼아 어머님과 함께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자리한 '거창사건 추모공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차로 족히 세 시간은 더 걸리는 교통이 매우 불편한 오지인데도 굳이 모시고 간 건 어머님의 구술을 통해 현대사와 관련된 살아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다. 추모시설과 묘비들 주변을 거닐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듯 들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머니는 현대사를 공부하는 내게 그 어떤 교재보다 소중하고 알찬 '교과서'다.
거창사건 추모공원을 떠나지 못했던 어머니
명절 때 고향 땅 산소를 찾아가다보면 이따금 당신의 신산했던 삶을 마치 소설 속 옛 이야기처럼 들려주시곤 했다. 대학 시절 읽었던 소설 <태백산맥>이 결코 '소설'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야 알았다. 소설 속 이야기를 슬쩍 들려드리면,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맞장구치셨다. 등장인물의 이름만 다를 뿐, 고향 마을 주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이고, 눈으로 직접 본 '떼죽음'만도 두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고.
그 즈음 나는 어머님을 '움직이는 한국현대사'로 별명지어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부터 제주 4·3과 여순 사건, 6·25 전쟁과 4·19, 5·16, 5·18 등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모두 겪으며 끝내 '생존'하셨으니, 조금도 과장된 별명은 아니다. 양민 학살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6·25 전쟁 당시 '이팔청춘'이셨던 당신은 그 엄혹했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왜정(어머님은 일제강점기를 지금도 이렇게 부른다) 때 순사 노릇 했던 이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기세등등하게 설쳐대는 통에, 다들 왜정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들 생각했지. 여순 반란사건(공식 명칭은 '여수 순천 10·19 사건'이지만, 여전히 당신의 기억 속에서는 '반란사건'이다)이 일어난 이후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을 잡아갔는데, 가족들이 그 이유를 알고 싶어도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는 세상이었어.
그때 근방의 나름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죄다 잡혀가 죽임을 당했지. 그들을 트럭에 싣고 밖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고깔을 씌웠는데, 마을 이웃이었던 한 젊은 남자가 자기 동네를 지나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내 죽거든 시신이라도 거둬 달라'며 고함치던 모습이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또렷해. 물론, 그땐 어디에서 죽이고 묻었는지 알지도 못했고, 설령 알았던들 시신을 수습하러 갈 수도 없었으니 가족들의 고통이야 오죽했겠니."
생면부지의 큰 이모부도 그때 희생됐다고 했다. 이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건 교사가 된 서른 즈음에서다. 여전히 '행불자'로 남아있는 기록이 조카의, 아들의 취업에 누가 될까봐 다들 쉬쉬했던 것이다. 사라진 지 이미 오래지만, 당신들의 기억 속에 연좌제는 강산이 다섯 번도 더 변한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그렇게 마음 졸여가며 반세기도 넘게 살아온, 슬픈 가족사다. 이는 어쩌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우리 현대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거창사건으로 희생된 719위나 되는 묘비들을 일일이 어루만지듯 돌아보셨다. 채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들의 묘비 앞에서는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곳에서 학살된 이들 중 2/3는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다. 그들은 단지 '산사람들(인민유격대)'에게 밥을 제공해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국군의 손에 끌려가 참혹한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더욱 가슴 미어지는 건, 그렇듯 어처구니없게 혈육이 희생당했으면서도 수십 년 동안 유가족들이 '억울하다'는 하소연조차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반세기가 가뭇없이 흘러 눈물로 세월을 보낸 유가족들마저 대부분 세상을 떠난 1997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특별법이 제정돼 을씨년스럽게나마 추모공원이 조성되었으니 그 한을 어찌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찾는 이들 거의 없는 그곳을 어머님은 두 시간이 넘도록 떠나지 못했다. '동병상련'의 마음에서일까. 참혹했던 그때를 곱씹듯 묘비마다 새겨진 이름과 생몰년도, 그리고 뒷면의 추모 글귀까지 빠짐없이 다 읽으셨다. 그곳을 나서며 어머니께서는 '교훈'인 양 새겨들으라며 한마디를 건네셨다. 진실로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정임에 틀림없지만, 듣자니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살다보면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할 일이 참 많다. 특히 '사상'이 그렇다. 그로 인해 아까운 사람들이 참 많이도 죽었다. 당시 공부 깨나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좌익'이 됐다. '좌익'은 '빨갱이'와 같은 말이었고, 그렇게 낙인찍히면 그걸로 끝이었다. '좌익'은 군인들과 서청(서북청년회)의 몽둥이에 맞아죽었고, 전쟁 나고 인민군이 들어왔을 땐 한 맺힌 그들이 군인과 서청의 사돈에 팔촌까지 찾아내 죽이며 보복했지.
대놓고 죽이지만 않을 뿐, 요즘이라고 별반 달라질 건 없어. 그저 입 다물고 사는 게 잘 사는 거야. 행여 네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을 소풍 핑계로 이런 곳에 절대 데려오지 말거라. 괜한 의심을 살라. 주말인데도 여길 찾는 사람들이 우리 말곤 없는 건, 사건을 잘 몰라서이기도 하겠지만, '좌익'이라는 단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 거야.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선 '좌익'이란 지금까지도 일종의 '천형' 같은 거야."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데모'는 제발 하지 마라"
당신의 기억과 처세를 위한 삶의 '지혜'는 60여 년 전 그 시기에 멈춰버렸고, 당시의 살벌했던 사회 모습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 셈이다. 20여 년 전 대학 입학식 날, 두 손을 꼭 잡고 건넨 말씀을 또렷이 기억한다.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데모'는 제발 하지 마라."
그것이 다 커 대학생이 된 막내아들에게 신신당부한 일성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무슨 일이든 앞장서지는 마라, 조변석개하는 게 세상인심이니 옳은 일이라 해도 휩쓸리지 말라는 말씀들은 노파심에 덧붙이신, 차라리 '사족'이었다.
얼마 전 서북청년회가 다시 결성됐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도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셨다. 과거 만행에 대해 반성과 사죄는 못할망정 대명천지에 서청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다시 내거는 게 당최 이해되지 않는다며, '그때'로 되돌아 간 듯한 세상이 정말 무섭다고 한탄하셨다. 지금도 서청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진다면서, 그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처럼 대놓고 죽이기야 하겠느냐만, 그들에게 꼬투리 잡혀 좋을 게 없다. 모르는 체하며 조용히 지내라. 그들에겐 이유고 뭐고 필요 없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생명도 한낱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이다.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전쟁이 끝나고도 수십 년 동안 '좌익'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수도 없이 '대한민국 만세'와 '때려잡자 김일성, 물리치자 공산당'을 외쳤던 분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선거 때마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나서서 자유당에 표를 몰아준 것도, 거칠게 말해서, 엄혹했던 시절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한다. '왼손'잡이마저 장애 취급을 하던 때였다며 빗대기도 했다.
당신께서 이번 '토크 콘서트장 폭발물 투척 사건'을, 배후가 있건 없건, 철딱서니 없는 '일베' 고등학생의 단순한 '불장난'으로 보지 않는 이유다. 광복 직후 서로 죽고 죽이던 극단적인 좌우 갈등의 연장선이고, 그때나 지금이나 정권과 기득권층은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조장해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거라고 여긴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맞섰다가는 '골로 간다'는 걸 알기에 몸을 사리는 게 상수라며 주억거리시는 거다.
그렇다고 해도 '비겁한' 팔순의 노모 같은 분들을 설득하려는 건 허망하고도 어리석은 짓이다. 책으로 배운 신념과 가치관은, 그것이 비루하고 그릇된 행태라고 할지라도 오랜 세월의 더께 속에 몸으로 터득한 처세관을 당해낼 수 없는 법이다. 엄혹했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뎌낸, 참으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사신 분들이다. 그들의 삶이 비루하다면, 그건 온전히 무능하고 치졸했던 대한민국 정부를 탓해야 옳다.
결국 미래세대 아이들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좌익 척결'을 외쳤다면, 요즘의 일부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좌빨 제거'를 입에 달고 산다.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조차 낯설어 하는 그들이 통일에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지만, 북한을 경멸하다 못해 맹목적으로 저주하는 모습에서 살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들만 떼어 놓고 보면, 광복 직후의 상황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퇴행적 역사 인식과 몰상식에 허우적거리는 우리 사회
어린 아이들마저도 시나브로 '종편의 자장' 속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아이가 범행의 이유로 언급한,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말했다'는 '믿음'도 애초 한 종편의 '속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과 '좌빨'의 기준을 종편이 머리에 쏙쏙 박히도록 그 아이에게 가르쳐준 셈이다.
비단 그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적잖은 아이들이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공부하고, 종편의 시각으로 사회를 읽는다.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세대이니 몸으로 시대의 아픔을 겪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책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세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란 그저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공자 왈 맹자 왈'일 뿐이다.
그 틈을 종편이 파고들었고,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외눈박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광복은 불가능했다고 철석같이 믿는가 하면, 6·25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는 무관심한 채 서청의 '좌빨 제거' 구호에는 아이들조차 다짜고짜 열광하는 퇴행적인 역사 인식과 몰상식에 우리 사회가 허우적거리고 있다.
급기야 극우 고등학생이 수백 명이 모인 토크 콘서트장에서 계획적인 '테러'를 저지르는가 하면, 팔순의 노모가 다시 '좌익'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자식에게 입조심, 몸조심을 당부하는 공포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무기력한 사회는 역사의 퇴행에 속수무책이고, 무능한 정부는 되레 갈등과 불신을 조장하며 기득권 유지에 안달 난 모양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이 끝나고 60년도 더 지난 2014년의 세밑,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오늘(11일) 아침 여느 때처럼 감기 조심하시라며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낼모레면 팔순인 노모께서 다짜고짜 이 말을 건넸다. TV 뉴스를 통해 전북 익산의 '토크 콘서트장 폭발물 투척 사건'을 접하고 꽤나 놀라신 모양이다. 더욱이 고등학생의 소행이라고 하니, 당장 그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늦둥이 막내아들이 걱정되더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아들이 한국사 교사라는 걸 알고 계신다. 특히 '시험에 거의 출제되지 않는' 광복 이후 6·25 전쟁까지의 역사에 외골수처럼 천착하며, 학교 안팎으로 현대사를 강의하러 다니고 있다는 걸 들으시곤, 뵐 때마다 입버릇처럼 '몸조심'하라는 이야기를 달고 사신다. 고3 시절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겠다고 했을 때, 당신께서 극구 말리셨던 걸 새삼 다시 떠올리게 된다.
자식이 역사를, 그것도 현대사를 공부하겠다는 건, 당신에겐 '위험천만한' 일이다. 어머니께선 전남 순천에서 나고 자란 까닭에 광복과 6·25 전쟁 즈음의 기억은 상상할 수도 없는 '끔찍함'으로 남아있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0년대에 10대 시절을 보냈고, 철든 후에도 여순 사건과 6·25 전쟁을 겪으면서 '그저 살아남는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위대한 일'인지를 체화하신 분이다.
이태 전 가족 소풍 삼아 어머님과 함께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자리한 '거창사건 추모공원'을 찾아간 적이 있다. 차로 족히 세 시간은 더 걸리는 교통이 매우 불편한 오지인데도 굳이 모시고 간 건 어머님의 구술을 통해 현대사와 관련된 살아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다. 추모시설과 묘비들 주변을 거닐다보면 자연스럽게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듯 들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머니는 현대사를 공부하는 내게 그 어떤 교재보다 소중하고 알찬 '교과서'다.
거창사건 추모공원을 떠나지 못했던 어머니
▲ 10일 오후 8시 20분께 전북 익산시 신동성당에서 열린 신은미·황선 씨의 토크 콘서트에서 고교 3년생 A군이 인화성 물질이 든 냄비를 가방 안에서 꺼내 불을 붙인 뒤 연단 쪽으로 향하다가 다른 관객에 의해 제지됐다. 이 사고로 매캐한 연기가 나면서 관객 200여명이 긴급 대피했다. | |
ⓒ 연합뉴스 |
명절 때 고향 땅 산소를 찾아가다보면 이따금 당신의 신산했던 삶을 마치 소설 속 옛 이야기처럼 들려주시곤 했다. 대학 시절 읽었던 소설 <태백산맥>이 결코 '소설'이 아니라는 것도 그때야 알았다. 소설 속 이야기를 슬쩍 들려드리면, 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맞장구치셨다. 등장인물의 이름만 다를 뿐, 고향 마을 주변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들이고, 눈으로 직접 본 '떼죽음'만도 두 손으로 다 헤아릴 수 없다고.
그 즈음 나는 어머님을 '움직이는 한국현대사'로 별명지어 불렀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광복부터 제주 4·3과 여순 사건, 6·25 전쟁과 4·19, 5·16, 5·18 등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모두 겪으며 끝내 '생존'하셨으니, 조금도 과장된 별명은 아니다. 양민 학살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던 6·25 전쟁 당시 '이팔청춘'이셨던 당신은 그 엄혹했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왜정(어머님은 일제강점기를 지금도 이렇게 부른다) 때 순사 노릇 했던 이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기세등등하게 설쳐대는 통에, 다들 왜정 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들 생각했지. 여순 반란사건(공식 명칭은 '여수 순천 10·19 사건'이지만, 여전히 당신의 기억 속에서는 '반란사건'이다)이 일어난 이후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을 잡아갔는데, 가족들이 그 이유를 알고 싶어도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되는 세상이었어.
그때 근방의 나름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죄다 잡혀가 죽임을 당했지. 그들을 트럭에 싣고 밖을 보지 못하도록 머리에 고깔을 씌웠는데, 마을 이웃이었던 한 젊은 남자가 자기 동네를 지나가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내 죽거든 시신이라도 거둬 달라'며 고함치던 모습이 7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너무나 또렷해. 물론, 그땐 어디에서 죽이고 묻었는지 알지도 못했고, 설령 알았던들 시신을 수습하러 갈 수도 없었으니 가족들의 고통이야 오죽했겠니."
생면부지의 큰 이모부도 그때 희생됐다고 했다. 이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건 교사가 된 서른 즈음에서다. 여전히 '행불자'로 남아있는 기록이 조카의, 아들의 취업에 누가 될까봐 다들 쉬쉬했던 것이다. 사라진 지 이미 오래지만, 당신들의 기억 속에 연좌제는 강산이 다섯 번도 더 변한 지금도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그렇게 마음 졸여가며 반세기도 넘게 살아온, 슬픈 가족사다. 이는 어쩌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우리 현대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거창사건으로 희생된 719위나 되는 묘비들을 일일이 어루만지듯 돌아보셨다. 채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들의 묘비 앞에서는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곳에서 학살된 이들 중 2/3는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이다. 그들은 단지 '산사람들(인민유격대)'에게 밥을 제공해주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국군의 손에 끌려가 참혹한 죽임을 당해야만 했다.
더욱 가슴 미어지는 건, 그렇듯 어처구니없게 혈육이 희생당했으면서도 수십 년 동안 유가족들이 '억울하다'는 하소연조차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반세기가 가뭇없이 흘러 눈물로 세월을 보낸 유가족들마저 대부분 세상을 떠난 1997년이 되어서야, 뒤늦게 특별법이 제정돼 을씨년스럽게나마 추모공원이 조성되었으니 그 한을 어찌 다 담아낼 수 있을까.
찾는 이들 거의 없는 그곳을 어머님은 두 시간이 넘도록 떠나지 못했다. '동병상련'의 마음에서일까. 참혹했던 그때를 곱씹듯 묘비마다 새겨진 이름과 생몰년도, 그리고 뒷면의 추모 글귀까지 빠짐없이 다 읽으셨다. 그곳을 나서며 어머니께서는 '교훈'인 양 새겨들으라며 한마디를 건네셨다. 진실로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정임에 틀림없지만, 듣자니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살다보면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할 일이 참 많다. 특히 '사상'이 그렇다. 그로 인해 아까운 사람들이 참 많이도 죽었다. 당시 공부 깨나 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좌익'이 됐다. '좌익'은 '빨갱이'와 같은 말이었고, 그렇게 낙인찍히면 그걸로 끝이었다. '좌익'은 군인들과 서청(서북청년회)의 몽둥이에 맞아죽었고, 전쟁 나고 인민군이 들어왔을 땐 한 맺힌 그들이 군인과 서청의 사돈에 팔촌까지 찾아내 죽이며 보복했지.
대놓고 죽이지만 않을 뿐, 요즘이라고 별반 달라질 건 없어. 그저 입 다물고 사는 게 잘 사는 거야. 행여 네가 지금 가르치고 있는 아이들을 소풍 핑계로 이런 곳에 절대 데려오지 말거라. 괜한 의심을 살라. 주말인데도 여길 찾는 사람들이 우리 말곤 없는 건, 사건을 잘 몰라서이기도 하겠지만, '좌익'이라는 단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일 거야.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선 '좌익'이란 지금까지도 일종의 '천형' 같은 거야."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데모'는 제발 하지 마라"
▲ 서북청년단 '살신보국' 정함철 서북청년단 대변인이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서울시립청소년수련원에서 대관취소에도 불구하고 강행 된 서북청년단 재건총회 진행을 준비하고 있다. | |
ⓒ 이희훈 |
당신의 기억과 처세를 위한 삶의 '지혜'는 60여 년 전 그 시기에 멈춰버렸고, 당시의 살벌했던 사회 모습이 지금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믿는 셈이다. 20여 년 전 대학 입학식 날, 두 손을 꼭 잡고 건넨 말씀을 또렷이 기억한다.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데모'는 제발 하지 마라."
그것이 다 커 대학생이 된 막내아들에게 신신당부한 일성이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무슨 일이든 앞장서지는 마라, 조변석개하는 게 세상인심이니 옳은 일이라 해도 휩쓸리지 말라는 말씀들은 노파심에 덧붙이신, 차라리 '사족'이었다.
얼마 전 서북청년회가 다시 결성됐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도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셨다. 과거 만행에 대해 반성과 사죄는 못할망정 대명천지에 서청이라는 부끄러운 이름을 다시 내거는 게 당최 이해되지 않는다며, '그때'로 되돌아 간 듯한 세상이 정말 무섭다고 한탄하셨다. 지금도 서청이라는 말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진다면서, 그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처럼 대놓고 죽이기야 하겠느냐만, 그들에게 꼬투리 잡혀 좋을 게 없다. 모르는 체하며 조용히 지내라. 그들에겐 이유고 뭐고 필요 없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사람의 생명도 한낱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자들이다. 그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전쟁이 끝나고도 수십 년 동안 '좌익'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수도 없이 '대한민국 만세'와 '때려잡자 김일성, 물리치자 공산당'을 외쳤던 분이다. 내키지 않았지만 선거 때마다 마을 사람들 전체가 나서서 자유당에 표를 몰아준 것도, 거칠게 말해서, 엄혹했던 시절 목숨을 구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한다. '왼손'잡이마저 장애 취급을 하던 때였다며 빗대기도 했다.
당신께서 이번 '토크 콘서트장 폭발물 투척 사건'을, 배후가 있건 없건, 철딱서니 없는 '일베' 고등학생의 단순한 '불장난'으로 보지 않는 이유다. 광복 직후 서로 죽고 죽이던 극단적인 좌우 갈등의 연장선이고, 그때나 지금이나 정권과 기득권층은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거나 조장해 자신의 잇속만 챙기는 거라고 여긴다.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맞섰다가는 '골로 간다'는 걸 알기에 몸을 사리는 게 상수라며 주억거리시는 거다.
그렇다고 해도 '비겁한' 팔순의 노모 같은 분들을 설득하려는 건 허망하고도 어리석은 짓이다. 책으로 배운 신념과 가치관은, 그것이 비루하고 그릇된 행태라고 할지라도 오랜 세월의 더께 속에 몸으로 터득한 처세관을 당해낼 수 없는 법이다. 엄혹했던 현대사를 온몸으로 견뎌낸, 참으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사신 분들이다. 그들의 삶이 비루하다면, 그건 온전히 무능하고 치졸했던 대한민국 정부를 탓해야 옳다.
결국 미래세대 아이들에게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좌익 척결'을 외쳤다면, 요즘의 일부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좌빨 제거'를 입에 달고 산다. '우리의 소원'이라는 노래조차 낯설어 하는 그들이 통일에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지만, 북한을 경멸하다 못해 맹목적으로 저주하는 모습에서 살기가 느껴질 정도다. 그들만 떼어 놓고 보면, 광복 직후의 상황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퇴행적 역사 인식과 몰상식에 허우적거리는 우리 사회
▲ 한 고3 학생이 신은미·황선 토크콘서트 현장에서 인화물질을 터트려 200여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고로 3명이 부상당했다. 사진은 인화물질 폭발 당시의 동영상 화면을 캡처한 것. | |
ⓒ 주권방송 |
어린 아이들마저도 시나브로 '종편의 자장' 속에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아이가 범행의 이유로 언급한, '북한을 지상낙원이라고 말했다'는 '믿음'도 애초 한 종편의 '속보'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하자면,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과 '좌빨'의 기준을 종편이 머리에 쏙쏙 박히도록 그 아이에게 가르쳐준 셈이다.
비단 그 아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적잖은 아이들이 드라마를 통해 역사를 공부하고, 종편의 시각으로 사회를 읽는다. 민주화 이후에 태어난 세대이니 몸으로 시대의 아픔을 겪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책을 통해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세우려고도 하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란 그저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공자 왈 맹자 왈'일 뿐이다.
그 틈을 종편이 파고들었고, 인터넷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소비되는 과정에서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똘똘 뭉친 '외눈박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아니었다면 광복은 불가능했다고 철석같이 믿는가 하면, 6·25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는 무관심한 채 서청의 '좌빨 제거' 구호에는 아이들조차 다짜고짜 열광하는 퇴행적인 역사 인식과 몰상식에 우리 사회가 허우적거리고 있다.
급기야 극우 고등학생이 수백 명이 모인 토크 콘서트장에서 계획적인 '테러'를 저지르는가 하면, 팔순의 노모가 다시 '좌익'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자식에게 입조심, 몸조심을 당부하는 공포의 시대가 다시 도래했다. 무기력한 사회는 역사의 퇴행에 속수무책이고, 무능한 정부는 되레 갈등과 불신을 조장하며 기득권 유지에 안달 난 모양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 전쟁이 끝나고 60년도 더 지난 2014년의 세밑,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