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조회 1685 | 2013-10-2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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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다 내려놨어요...정말? 뭘요?

공부를 곧잘 하던 영수가 몇 달 전 갑자기 바뀌었다. 학원을 그만 다니겠다는 것이다. 처음엔 지쳤나 보다 생각하고 한동안 쉬라고 했다. 집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지내는 게 못마땅했지만 그동안 너무 몰아친 게 아닌가 싶어 어머니도 미안한 마음이 있었기에 두고 보기로 했다. 성적이 확실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학교를 갔다가 오면 집에 와서 자기 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제는 정말 다 내려놨어요.”

 집에 돌아와서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상했다. 한 두 달이 지나도 아이는 다시 공부를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속이 이만저만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다 내려놨어…”라며 마음을 다스렸다. <출처: gettyimages>

영수의 친구 어머니들과 만난 영수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면서 이야기 한다. 그러자 듣던 다른 어머니들은

“영수 엄마, 우린 벌써 예전에 다 내려놨네.”

“맞아. 더 내려놓을 것도 없어. 그래도 영수는 잘했잖아.”

다른 어머니들의 위로가 위로같이 들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상했다. 한 두 달이 지나도 아이는 다시 공부를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험을 봤는데, 성적은 생각보다 많이 떨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마음뿐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특목고도 생각해볼 정도로 공부를 잘했는데,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것 같았는데 속이 이만저만 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마음을 다스리는 길은 한 마디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다 내려놨어..”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다가 아이는 조금씩 표정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식구들과 대화도 늘었고, 목소리도 밝아졌다. 영수의 이런 변화를 보고 난 어머니는 다시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영수가 뒤쳐진 부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과외선생님을 붙이는 것이 좋을지, 새로운 학원을 다니면 좋을지 머릿속이 분주해졌다. 그러면서 영수가 학교 갔다 와서 가방을 던져놓고 TV를 켜고 보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정신과를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이 되고, 아이가 학교를 계속 다니고, 가족들과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고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하는 마음이었는데 말이다.

영수 어머니는 몇 번이고 “다 내려놨다”고 말을 해왔다. 진짜 영수 어머니는 다 내려놓은 것일까?

다 내려놓음의 진실은?

 도대체 뭘 들고 있다가 내려놨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 그저 내려놓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부모가 자신에게 하는 자기최면과 같은 말뿐이기 쉽다. <출처: gettyimages>

많은 부모들이 아이가 기대보다 못한 모습을 보일 때 전형적으로 하는 말이다. 보이면 혼잣말을 하듯이 얘기한다. “다 내려놨어요” 그 말을 할 때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한다. 실망스러운 감정과 함께 동시에 짜증과 허탈감, 그렇지만 그 안에 깊은 곳에서는 ‘언젠가는 정신차리고 잠재력이 터져서 대 역전극을 벌이지 않을까’라는 실낱같은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희망을 엿볼 수 있다. 그만큼 다 내려놓는다는 말을 할 때에는 복잡한 감정이 표정에 스쳐 지나간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에 공감을 한다. 그러나, 영수의 어머니에게 볼 수 있듯이 도대체 뭘 들고 있다가 내려놨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 그저 내려놓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부모가 자신에게 하는 자기최면과 같은 말뿐이기 쉽다.

‘다 내려놓는다’라는 말속의 가장 큰 핵심은 부모의 소망이다. 아이가 어떤 성취를 이루기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치가 보이지 않는 상징적 높이로 선이 그어져있다. 그리고 그곳을 가기를 바란다. 아직 어릴 때에는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이 기대가 된다. 다른 아이보다 조금 노래를 잘하고, 셈이 빠르고, 재치있는 말을 하면 기뻐하며 아이가 그 길로 가서 할 수 있는 최대치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나가면서 현실적인 실체를 맞닥뜨리면서 많은 부분 그런 처음의 기대치를 수정하면서 현실적인 목표치로 수정해나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혹시나’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 채 더 열심히 아이를 교육하고, 시간관리를 해주고, 더 좋은 학원을 알아봐주고, 경력관리를 해준다면 그 기대치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부모 자신이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고, 또 지금의 사회경제적 성취가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었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그런 기대가 강한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내려놓는다고 해도 아주 조금, 조금밖에 내리지 못한다.

기대치에 대한 간극

부모가 바라는 아이에 대한 첫 목표 에베레스트 정복이었다. 등산을 한 번 시작했으면 그 정도는 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에 맞닥뜨리고 ‘다 내려놓았다’라고 말을 하며 기대치를 낮춘다. 하지만 여전히 히말라야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마나슬루K2정도는 올라가야 등산을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현실적으로 등산을 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설악산이나 한라산을 오르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실현 가능한 기대치인데 말이다. 여기서 벌어지는 간극의 차이에 ‘다 내려놨다’고 말하면서도 또다시 아이를 다그치게 되고, 만족스럽지 못하고, 조바심을 내게 되는 메커니즘의 핵심이 놓여있는 것이다.

기대치를 현실화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가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과 현실적인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기대치와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클수록 마음의 고통은 비례해서 강해진다. 비브링(Bibring)이라는 정신분석가는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 목표인 자아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크고, 사실상 그 사이를 메울 수 없다는 것을 직면하는 것이 우울증의 심리적 원인이라고 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은 저 멀리 높은 곳에 있는데 지금의 나의 현실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도저히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만큼 힘든 일이다. 이때 우울증 환자들의 특징은 자아이상이 지나치게 높게 설정되어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갖고 있는 현실적 가치를 너무 과소평가해서 실제보다 둘 사이의 간격을 크게 인식하는 것이다. 치료도 둘 사이의 간격을 적절한 수준으로 재조정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기대치와 현실 사이의 괴리로 인해 우울한 감정은 가만히 있지 못한다. 프로이트는 우울감이란 자기를 향한 공격성이라고 했다. 우울함은 죄책감으로 변해서 자학을 하게 만들고, 부정적인 감정은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보듯이 현실을 어둡게 채색한다.실제보다 부정적으로 해석하게 하고, 자기문제로 치환해서 자학을 하기도 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잘 해주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는 죄책감을 갖게 된다.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대신 공부를 할 수는 없으니 아이에게 맞는 더 좋은 학원을 찾아주려고 한다.

부모가 원하는 소망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 스스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식의 우울은 부모의 우울이지 아이의 우울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십대의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다 내려놓다’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봐야 한다. 내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교육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바라는 기대치가 자신의 인생에서 성공이나 성취, 행복을 위해 달성해야 하는 것의 문제라면 자신이 다스리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부모의 아이에 대한 기대치는 자신이 원하는 소망을 아이가 대신 얻어주기를 투사(投射. projection)한 것이다. 투사는 자기 마음 안의 것을 무의식적으로 자기 밖의 다른 대상을 향해 던지는 방어기제의 하나다. 투사를 하면 내 안에 담아놓지 않아도 돼서 당사자는 편안하다. 그리고 투사된 소망이 실현되지 않으면 상대를 탓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더 편리하다.

부모에게 아이는 ‘확장된 자아(extended ego)’의 일부다. 아이가 부모를 동일시하는 것은 당연한 발달의 한 과정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자신의 일부로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묶는 경향이 특히 강하다. <출처: gettyimages>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부모와 아이 사이의 관계에는 한 가지 더할 것이 있어 복잡해진다. 즉, 투사를 하는 아이가 분신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부모에게 아이는 ‘확장된 자아(extended ego)’의 일부다. 아이가 부모를 동일시하는 것은 당연한 발달의 한 과정이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자신의 일부로 무의식적으로 강하게 묶는 경향이 특히 강하다. 아이의 성공 혹은 성취가 곧 자신의 성취가 되고, 아이의 실패가 자신의 실패가 되어 실제로 아파한다. 어떨 때에는 아이보다 더 아파하고 힘들어한다. 그것은 부모의 염원이 아이를 향해 투사되었는데, 그것이 또한 자신의 일부이기도 하다고 강하게 묶어서 동일시하면서 내 팔다리의 확장된 버전으로 인식하고 있기에 더 아파한다. 아이는 현재의 실패만 아프지만 부모는 미래까지 내다보면서 미리 아프기 때문이다.

내려놓는 것은 그냥 아이라는 결국은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게 아니라 ‘나의 소망을 포기하는 것’이자 ‘나의 확장판의 완성도를 낮추는 것’이며 ‘내 인생의 성적표’가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일이다. 내려놨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 마음 안에서 내려놓았다는 것은 생각보다 적은 수준으로 하향조정을 할 수 밖에 없다.

부모가 자신의 마음을 중심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다 내려놓다’의 두 번째 요소다. 아이는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속에서만 아이에 대한 기대치를 혼자서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며 일희일비하고 있다. 성적이 조금 오르면 기대치를 확 올렸다가, 아이가 지치거나, 노력한 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바로 크게 실망한다. 이런 마음의 변화를 아이는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그 기대를 충실히 실현할 수 있는 아이는 아주 운 좋은 소수일 뿐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교하면서 아이를 통해 부모 자신의 삶의 성적을 매기고 있기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 존재 ‘엄친아’로 인해 스트레스 받는 아이와 부모만 남기 쉽다.

이런 문제의 해결은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의 전환에서 찾아야 한다. 부모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잊어버리면서까지 아이에 대한 기대가 충족되는 정도에 따라 자기 인생의 핵심적 평가가 오르락 내리락 해서는 안 된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부모는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부모

[스크림프리]의 저자 헬 에드워드 렁켈은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부모는 아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부모다’라고 했다.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를 통해 내 소망이 충족되는 것이 아닌, 아이가 자신의 삶과 결심, 그리고 미래를 가지고 태어난 개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아이가 잘 자라서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잘 살아가는 어른이 되고 주체적 개인이 되는 것이 부모의 육아의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는 자신의 욕망을 거두고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려는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랫동안 해온 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아이가 직접 생각할 여유를 주고, 갈 길을 찾을 때까지 마냥 기다리다가는 너무 뒤쳐져버리고 최소한의 성취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 크다. 바로 방향이 다른 불안이다. 하지만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이다. 부모가 낳은 존재이지만 또한 아이는 독립적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헬 에드워드 렁켈은 자녀교육에서 가장 해로운 거짓말은 "부모가 아이의 삶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말"이라 했다. 분명 부모는 아이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실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객관적으로 그리 많지 않다. 아이는 자기가 갖고 있는 토양 안에서 자라난다. 이때 물을 뿌리고 약간의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그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고 나름대로 자라는 그것을 옆에서 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거기서 무엇이 피어나고, 어떤 열매가 영글며, 또 얼마나 크고 싱그럽게 자라는가는 아이라는 밭에 달려있다. 이 어려운 일을 함께 해나가면서 부모도 아이가 자라듯이 성장하고 더 나은 어른이 되가는 것이다.

부모가 해줄 것은 왜 여기밖에 못 왔냐고 타박을 하고, 채찍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는 길 옆에서 손뼉을 치며 응원을 해주는 것이다. <출처: gettyimages>

우리는 세상을 통제하기를 바란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바란다. 부모 자신이 자신의 삶을 살아봐서 이미 잘 깨닫고 있지만 세상이란 불완전하며 세상을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더욱더 아이의 삶이 부모의 바람과 기대에 맞춰 안전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안타깝지만 아이는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또, 기대하는 것 또한 부모의 기대일뿐, 실제의 목표치도 아니다. 이미 내가 기대하고 있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 일희일비 하지 말자. 그래야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거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 아이가 잘못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자신이 양육에 능력이 없고, 허망하며, 해결능력이 없다고 여기는 좌절감이다. 기대를 한다는 것은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 내려 놓는 것은 막막해지는 것이고 그래서 두려워진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필요이상의 압박감에 시달릴 필요는 없다. 막막해할 필요도 없다. 아이에게 쏟을 에너지를 이제는 부모 자신의 삶에 투여하려고 노력하자. 부모가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즐거운 것만큼 좋은 양육은 없다.

그리고, “다 내려놨다”는 말을 이제 하지 말자. 올려다보는 것도 하지 말고, 또 내려놓지도 말자. 부모의 마음만 출렁일 뿐이다. 정작 아이는 언제나 그 위치에 있으면서 알아서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고 있다. 부모가 해줄 것은 왜 여기밖에 못 왔냐고 타박을 하고, 채찍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가는 길 옆에서 손뼉을 치며 응원을 해주는 것이다. 이기고 있건 지고 있건 간에 언제나 한 편이 되어 주고 등돌리지 않고 결승선까지 함께 가 줄 사람은 부모밖에 없으니까.

하지현/건국대학교 병원/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마쳤다. 용인정신병원 정신의학연구소에서 근무했고, 캐나다 토론토 정신분석연구소에서 연수한 바 있다. 현재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진료를 하며, 읽고 쓰고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심야치유식당], [청소년을 위한 정신의학 에세이], [예능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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