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부모와 아이 사이…어떻게 만들어 갈까?|

조회 1868 | 2014-03-04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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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심리치료사 하임 G. 기너트 박사는 아이들의 심리를 건강하게 해주는 일은 전문 심리치료사가 아니라 매일 아이들과 접촉하는 부모들의 몫이라고 말한다. 그는 부모들이 아이의 인격을 훼손하지 않고 대화하는 법, 올바른 칭찬과 체벌, 아이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법을 배워야 훌륭한 부모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부모들이 꼭 알아야 할 사랑의 기술.

아이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좋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부모들에게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외과 의사가 수술실에 들어와서, 마취 전문 의사가 우리에게 주사를 놓기
전에 “사실 난 수술 실습을 많이 받지는 않았지만, 환자들을 사랑해요. 상식에 따라 수술할 거예요.” 하고 말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 것인가? 아마도 두려운 나머지 도망칠지도 모른다.

아이들의 일상적인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려면 부모들도 외과 의사들처럼 특별한 기술들을 배워야 한다. 수술 부위에 조심스럽게 칼을 갖다 대는 숙련된 외과 의사처럼, 부모들 또한 말을 기술적으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말이란 바로 외과 의사의 칼과 같기 때문이다.

훌륭한 부모가 되려면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다. 아이를 좀 더 사랑해주고, 아이에게 좀 더 관심을 보여주고, 아이에게 좀 더 많은 시간을 주라는 식의 틀에 박힌 충고는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아이에게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을 갖춰야 하는 걸까.

인격을 존중하는 대화 기술
우리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모들만 아이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고 싶어 한다. 불행하게도 아이를 사랑하고, 선의를 가진 부모들도 아이를 비난하고, 창피 주고, 꾸짖고, 조롱하고, 위협하고, 매수하고, 낙인찍고, 처벌하고, 설교하고, 훈계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부모들 대부분이 말이 가진 파괴적인 힘을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옛날에 자기 부모들에게 들었던 말들을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다. 본래는 입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던 말들을, 자기도 좋아하지 않았던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의사 소통의 비극은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곧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아이와의 의사소통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출발해야 하는 것일까.

질문에 숨어 있는 아이의 속마음을 읽는다

아이들과의 대화는 마치 예술 같아서, 그 의미하는 바와 법칙이 특이하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을 그저 천진난만하다고만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아이들의 말을 이해하려면, 마치 암호를 해독할 때처럼, 기술이 필요하다.

엄마의 손을 잡고 처음 유치원에 온 다섯 살 난 낸시가 큰 소리로 말했다.
“누가 그림을 이렇게 밉게 그렸어, 엄마!”

얼굴이 화끈거린 낸시의 어머니는 못마땅한 얼굴로 딸아이를 쳐다보면서 나무랐다.
“예쁜 그림들을 밉다고 말하면 안 돼!”

옆에서 듣고 있던 선생님이 아이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고 싱긋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는 그림을 꼭 예쁘게 그리지 않아도 괜찮아. 자기가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 돼.”
낸시는 그때서야 자기가 알고 싶었던 물음의 속뜻, 즉 ‘그림을 잘 못 그리면 무슨 벌을 받을까?’ 하는 것에 대한 만족스런 대답을 얻고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설교와 비판, 일방적인 훈계는 피한다
아이들은 부모와의 대화를 피하려고 할 때가 많다. 아이들은 부모에게서 설교나 일방적인 훈계를 듣기 싫어할 뿐더러 비난을 받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아이가 나누는 대화를 귀담아들어보면, 그들이 주고받는 말에는 굉장한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대화는 마치 서로 다른 두 개의 독백처럼 들린다. 한 사람은 나무라며 또 다른 사람은 부인하고 변명한다. 이렇게 비극적인 대화가 오고 가는 까닭은 서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격으로서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부족한 탓이며,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다루는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행동이 아니라 감정에 대응한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새로운 방법의 바탕이 되는 것은 ‘존중’과 ‘기술’이다. 첫째, 어른이 자존심을 가지고 있듯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자존심도 존중해주어야 한다. 둘째, 충고나 지시를 할 때, 부모는 미리 그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아이가 선생님에게 야단맞았다고 말할 때, 자세한 내용을 물을 필요가 없다. “무슨 짓을 했기에 야단을 맞았니? 야단맞을 짓을 했으니까 선생님께서 소리를 질렀겠지. 말썽을 피운 게 틀림없어. 무슨 말썽을 부렸니?” 하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아이가 겪었을 아픔과 부끄러움, 그리고 복수심 같은 것에 대해서 이해하는 마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아이가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게 한다
부모들은 모두 어른으로서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거나, 혼돈을 느끼거나 서글퍼한다. 감정이 상할 때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어주고 이해해주는 사람만큼 위안이 되고 도움이 되는 존재가 없다. 어른에게 들어맞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들어맞는 법이다. 상냥한 대화는 비판과 설교 그리고 충고를, 인간을 이해해주는, 다시 말하면 마음을 치료하는 진통제로 바꾸어준다. 아이가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혼동을 느끼거나, 슬퍼할 때, 우리는 대부분 당장 뛰어들어 판결을 내리며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좀 더 좋은 방법은 시간을 두고 동정심을 가지고 아이를 이해하면 완전히 다른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칭찬과 혼내기 기술

심리 치료를 할 때는 아이에게 “넌 훌륭한 꼬마야. 넌 대단해.” 라고 말하는 법이 절대 없다. 판결을 내리고 가치를 평가하는 칭찬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칭찬은 아이를 불안하게 하고, 남에게 의지하게 하며,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것은 타인의 판결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자립, 자발, 자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칭찬이 아이에게 자신감과 안정감을 준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칭찬이 긴장과 나쁜 버릇을 초래할 수도 있다. 칭찬을 받을수록 아이의 버릇이 더 나빠지는 것은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칭찬과 바람직하지 못한 칭찬을 구분한다
칭찬이란 페니실린 주사처럼 함부로 놓아서는 안 된다. 잘 듣는 약이 모두 그렇듯이, 약을 쓸 때에는 법칙과 주의가 필요하다. 법칙이란 시간과 양 그리고 부작용의 가능성들이다. 감정에 쓰이는 약에도 이와 비슷한 법칙이 있다. 칭찬할 때 가장 중요한 법칙은 성격과 인격에 대해서 칭찬하지 말고, 꼭 아이의 노력과, 노력을 통해 성취한 것에 대해 칭찬하는 것이다. 아이가 마당을 쓸었을 때, 열심히 했다든가 마당이 아주 깨끗해졌다고 하는 말은 자연스런 칭찬이다. 그러나 매우 착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이가 한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적절한 표현도 아니다.

칭찬하는 과정을 지킨다
칭찬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칭찬을 하려거든 아이들이 노력하였거나 도움을 주었거나, 배려를 하였거나, 새로운 것을 해냈거나, 성취한 일에 대해서 어떤 점이 마음에 들고, 어떤 점을 높이 평가하는가를 명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칭찬의 표현은 아이들이 자신의 성품에 대해서 실제적인 결론을 이끌어내지 않을 수 없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아이를 비판하기보다는 이끌어준다

평가를 내리는 칭찬과 비판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둘 다 상대방에 대해 판결을 내린다. 판결을 내리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고, 심리학자들은 아이들을 이끌어주려고 한다. 비판할 때, 부모들은 아이의 인격과 성품에 대해 비난을 퍼붓는다. 이끌어줄 때는 문제에 대해, 그리고 가능한 해결책에 대해 언급한다. 아이 자신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일을 저지른 아이의 인격에 대하여 나무라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럴 때는 그저 벌어진 사건 자체만 다루고, 사람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아이의 잘못에 차분하게 대처한다
많은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소동을 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에서 시작하여 예측할 수 있는 과정을 밟는다.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는 흔히 모욕적인 말로 꾸짖는다. 그래서 아이가 버릇없는 말로 대꾸하면 부모는 큰 소리를 지르고 윽박지르거나 매를 든다. 비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판은 분노와 적대감을 낳는다.

분노는 이용하지 않는다
아이를 교육하다 보면 부모가 화를 내야 할 때가 있다. 사실 어떤 시점에서 화를 내지 못할 경우, 이것이 아이에게 선의가 아니라 무관심으로 전달될 때가 있다.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노를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파도처럼 쏟아지는 격노와 폭력을 아이들이 참아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부모에게 분노는 값비싼 감정이다. 그 값을 다하기 위해서는, 이익이 남는 곳에 그것을 쏟아야 한다. 화가 났다는 사실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해 분노를 이용하지는 말아야 한다.

▶아이를 변화시키는 부모 행동 기술
많은 부모와 아이들의 관계가 자기 파괴적인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방법으로 아이들을 대할 경우에는 장기적인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할 뿐더러, 당장 큰 혼란을 초래할 때가 자주 있다. 자기 파괴적인 유형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위협하고, 매수하고, 약속하고, 빈정대고, 거짓말이나 도둑질에 대해 설교 투로 훈계하고, 사나운 태도로 공손함을 가르치는 것들이다. 부모라면 아이들을 효율적으로 대하는 방법을 익혀야만 한다. 그러면 사소한 실수가 커다란 재앙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위협의 말로 아이의 행동을 부추기지 않는다
위협은 아이에게 금지된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 녀석, 한 번만 더 그랬단 봐라.” 하고 위협할 경우, 아이는 ‘이 녀석’이란 말보다는 ‘한 번만 더 그랬단 봐라.’라는 말에 더 귀가 솔깃해진다. 아이들은 위협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엄마는 내가 정말로 한 번 더 그런 행동을 하기를 바라고 있어, 안 그러면 실망할 거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경고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며 아이들로 하여금 나쁜 행동을 되풀이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아이를 존중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훌륭한 부모라면, 훌륭한 교사처럼, 아이들에게 점차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스스로 선택을 내리고, 자기 힘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주는 안내자가 되어야 하며, 거기서 만족을 느껴야 한다. 아이가 어떤 요구를 했을 때, 부모의 마음속 반응이 긍정적이면, 이것을 아이의 자립심을 고취할 수 있게 하는 표현에 담아 전한다. “네가 원한다면.” “네가 바라는 것이 진정 그것이라면.” “결정은 네가 내려” “사실 그건 네게 달려 있어.” “그것은 전적으로 네 선택에 달려 있어.” “네가 어떻게 결정하든, 난 다 괜찮아.” 우리는 모두 아이들이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책임감이라는 교훈은 존중하는 마음에 담아 전하지 않으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만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조건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부모가 먼저 아이들에게 약속을 해서도 안 되고, 아이들에게 밀려 약속을 강요당해서도 안 된다고들 한다. 어쩌다가 약속에 대해 이런 터부가 생긴 걸까?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는 믿음이 가장 중요하다. 부모가 자기가 한 말을 강조하기 위해 약속을 해야 한다면, 이는 약속을 하지 않은 말은 믿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약속은 아이들에게 비현실적인 기대를 품게 한다. 무엇을 해주겠으니 앞으로는 착한 행동을 하라거나 과거의 버릇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거나 하는 약속을 아이에게 요구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약속을 하는 것은 마치 부도 수표를 발행하는 것과 같다. 아이들에게 이런 좋지 못한 습관을 길러주면 안 된다.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 닮아가게 한다

예의는 인격의 특성이자 동시에 사회적인 기술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예의 바른 부모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그런 부모를 본받음으로써 예의를 배우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예의는 예의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부모들은 거친 방법으로 예의를 가르칠 때가 많다. 아이가 깜박 잊어버리고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걸 지적한다. 그런데 이는 어른으로서 예의 바른 처사가 아니다. 엄마가 먼저 감사의 인사말을 건넨다든지, 나중에 자기들끼리 있을 때 좀 더 부드럽게 처리할 수도 있다. 그 자리에서 당장 야단을 치는 것보다 번거롭긴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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